헌법재판관 임명과 법원의 내란죄 체포영장 발부로 탄핵 절차와 내란 수사가 본격화되자, 윤석열 대통령이 여론전에 뛰어들었다. 주로 변호인단을 통해 법적 대응에 나섰던 것을 넘어, 이젠 지지자를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1일 “애국시민 여러분, 주권침탈세력과 반국가세력의 준동에 대한민국이 위험하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관저 앞 수백 명의 지지자에게 전달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 “유튜브로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 국가나 당이 주인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자유민주주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도 했다. 그간 윤 대통령 공식 메시지에서 등장하던 ‘국민 여러분’ 대신 이날 편지에선 ‘애국시민 여러분’이란 표현이 쓰였다. 이는 “대한민국은 애국시민(자유우파) 대 종북주사파 간의 전쟁”이라고 하는 극우 유튜브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애국시민은 태극기 부대로 통칭되는데, 윤 대통령이 자신의 메시지 청자(聽者)를 정확히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 대통령 측 인사는 2일 통화에서 “영하의 날씨에 응원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일 뿐”이라고 했지만, 정치권에선 윤 대통령이 “진지전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남동 관저에 머물며 지지자를 방패막이 삼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체포영장을 막고, 우호 여론을 형성해 헌재 탄핵심판에 반전을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2021년 1월 시민들을 선동해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듯, 윤 대통령이 지지자를 방패막이로 삼아 헌정 질서를 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최진웅 국정메시지비서관이 지난주 사표를 내고 윤 대통령 변호인단에 합류한 것도 여론전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관측이다. 최 전 비서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연설기록비서관 출신이다. 친윤계 인사는 “사실상 헌법재판소 재판은 국민 여론에 좌우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따라서 지지 여론을 높아지면 탄핵기각도 노려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박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태로 탄핵당한 것도 결국 여론전에 밀렸기 때문이란 게 윤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여당부터 우려가 나온다.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2일 SBS라디오에서 “윤 대통령의 편지로 국민 간 충돌이 이어질까 싶어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김상욱 의원도 CBS 라디오에서 “대중들 뒤에 숨어서 비겁한 행동과 말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일부 유튜버들은 “100ℓ 휘발유가 든 드럼통이 폭발하면 불바다가 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
2017년 3월 박 전 대통령 탄핵선고 집회 현장에선 4명의 시민이 사망했는데, 여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가장 가슴 아파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관저를 지키는 경호처도 체포영장 집행 시 지지자와 경찰 사이의 물리적 충돌을 우려하고 있다. 윤 대통령 변호인단은 공수처 체포영장의 불법성을 주장하고 있어, 경호처 역시 기존대로 경호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지만, 신분은 여전히 현직 대통령”이라고 했다.
한편,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에 반발해 사의를 표했던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일단 업무를 계속 수행하기로 했다. 여권 인사들의 만류에 뜻을 접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 대행과 정 실장의 불편한 기류는 이어지고 있다. 최 대행은 지난달 31일 헌법재판관 2명을 임명할 당시 대통령실을 거쳐야 하는 전자 결재 대신 수기 결재를 택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최 대행의 일방적 결정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