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99학번 정한영(44)씨는 블랙핑크 로제(본명 박채영·27)의 ‘아파트’(APT.)가 낯설지 않다. 정씨는 “대학 MT에서 아파트 게임을 했다. 로제의 노래를 들으니 추억이 떠오르면서 동기들이 보고 싶어졌다”며 “바니바니 게임도 했었다”고 회상했다.
한국 사람이면 한 번쯤 들어봤을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게임, 랜덤게임~ 게임 스타트”라는 가사와 멜로디로 시작하는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 로제의 아파트는 한국의 술게임 ‘아파트’에서 유래됐다. 아파트 게임은 두 손을 번갈아 움직이다 특정 숫자를 외치면, 가운데로 두 손을 모아 아파트 모양처럼 겹쳐 쌓는다. 외친 숫자가 5라면 밑에서 5번째 손의 주인이 벌주를 마셔야 한다.
로제의 아파트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 K팝 여성 가수 최고 순위인 8위를 기록하는 등 전 세계적 열풍에 중심에 서자, K-술게임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외국인들이 아파트 게임을 하는 챌린지가 유행이다.
한국에서의 독특한 문화인 점도 K-술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한 이유 중 하나다. 탁구공을 테이블 너머로 던져 반대편 맥주잔에 공을 떨어뜨리는 비어퐁(beer pong) 등 해외에서도 술게임이 있지만 한국처럼 다양하지 않다. 한국의 술게임은 수백개로 추정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흥겹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새로운 문화가 융합돼 외국인들이 술게임에 재미를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K-술게임은 보통 첫 모임 등에서 어색한 분위기 깨기 위해 진행한다는 특징이 있다. 20대가 많은 대학가에서 주로 이뤄줬다. 대학 MT에서 술게임이 빠지지 않는다.
1970~80년대 술게임은 현재의 술게임보다 단순했다. 술병 돌리기나 특정 주제에 대한 단어를 이어가는 게임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엔 술게임이 다양해졌다. 박자에 맞춰 자신에게 부여한 호칭을 말하는 ‘아이엠 그라운드 게임’ 등이 이때 등장했다.
이희수 한국음주문화관리협회장(대구한의대 메디푸드HMR산업학과 교수)는 “한국의 술게임 문화는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마시는 ‘수작(酬酌)’ 문화 영향으로 발달했다. 술자리에서의 유대감 형성이 중요했다”며 “산업화와 경쟁사회로 스트레스를 많이 경험하다 보니, 스트레스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게임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강압적 술문화에 사망사고…Z세대, 술 없는 앞풀이
술게임은 강압적인 술문화의 상징이었다. 벌주로 소주 한사발 등 많은 양의 술을 강권했기 때문이었다. 술자리에서 술게임을 거부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97학번 김모(46)씨는 “강압적인 선배들 때문에 술게임을 거부하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다”며 “술게임 한번하면 너무 힘들어 다음날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99년 동아리 MT에 참여한 한 대학생이 술게임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대학생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심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사건으로 대학가에선 강압적인 술문화를 퇴출시키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점차 나왔다. 02학번 정모(41)씨는 “강압적 문화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면서도 “군 복학 이후 복학 전보다 술을 강요하는 사람이 줄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금 술게임으로 변질해 성추문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2016년 건국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에서 선배들이 몸으로 유사 성행위를 묘사하고 신입생에게 해당 단어를 맞추는 ‘몸으로 말해요’ 등이 진행돼, 총학생회가 사과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로 술게임도 변곡점을 맞이했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겐 벌주 대신 물이나 음료수를 마시게 하거나, 욕설 같은 단어도 술게임에서 퇴출당했다. 16학번 김정윤(27)씨는 “선정적인 술게임 논란으로 러브샷 같은 벌주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다양한 Z세대 개성만큼 과거보다 강압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2020년대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술게임 문화가 잠시 끊겼다. 대학 MT에선 여전히 술게임 인트로가 들리지만, Z세대 사이에선 앞풀이 문화가 등장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이전에 카페나 식당 등에서 소규모로 모여 술 없이 친분을 쌓는 것이다. 대학가 일부 식당이 “시끄러워 영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술게임을 반기지 않는 이유도 있다. 24학번 이진아(19)씨는 “술 없이 밥만 먹어도 친해질 수 있다”며 “맨정신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