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체를 화물로 부쳐라” 전두환 굴복시킨 YS의 단식

2024-10-21

전두환 비사

제7부. 전두환 철권통치의 몰락

1회. 2·12 총선 오판과 패배

‘임기 후반을 맞는다는 것은 마라톤 경기로 말하면 반환점을 돌아서는 시점에 와 있다는 뜻이다. 마라톤은 같은 길을 왕복해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왕복 코스도 있지만, 출발점과 도착점이 다른 편도 코스도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출발점과 결승점이 다른 편도 코스다. 이제 내가 달려가야 할 코스는 누구도 달려 본 적이 없는 난코스다. 나뿐 아니고 나에 앞서 이 길을 달리던 다른 선수 누구도 완주한 적이 없는 코스다. 일단 완주만 해도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이 된다.’(전두환 회고록)

공들인 중간평가 총선, 사실상 참패

전두환은 6개월 사이에 대통령에 두 번 취임했다. 첫 번째는 1980년 9월 11대 대통령 취임. 5·18 광주민주항쟁을 진압한 직후 어수선한 와중에 박정희가 만든 유신헌법에 따라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뽑혔다. 두 번째는 1981년 3월 12대 대통령 취임. 전두환이 직접 만든 5공 헌법에 따라 역시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임기 7년. 따라서 1985년 2월 12일 총선은 12대 대통령 전두환의 임기 중반에 치러지는 중간평가 성격이었다.

전두환은 총선 승리를 낙관했다. 그간의 경제 성과가 전례 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정권 초 마이너스였던 경제성장률(GNP)이 10%를 넘어섰고, 고질병이었던 고물가도 도매물가상승률 0.5%로 잡혔다. 국제적으로 저유가와 저환율이 지속되면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리던 급속성장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참패였다. 전체 의석 276석 가운데 여당인 민정당이 148석을 차지해 과반수를 넘겼다. 선거 직전 양김(김영삼·김대중)이 급히 만든 강경 야당 신민당이 67석을 얻었다. 5공이 만든 온건 야당 민한당이 35석, 더 온건한 야당 국민당이 20석을 차지했다.

외형상으로는 참패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민정당의 경우 이전 총선에서 151석에서 3석을 잃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민정당이 수치상 선방할 수 있었던 것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이다. 선거구마다 2명의 당선자를 뽑았기에 민정당은 어지간한 지역에선 당선자를 배출했다. 그런데 1981년 11대에서 1등을 했던 민정당 후보 다수가 1985년 12대에선 2등을 했다. 특히 서울에선 대부분 2등으로 겨우 붙었다.

특히 집권여당의 참패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야권의 판도 변화다. 5공이 출범하면서 만들어 놓은 온실 구조가 신민당 바람에 다 날아갔다. 사실상 어용 야당인 민한당이 81석에서 35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얼마 뒤 강풍에 놀란 민한당 당선자 35명 중 32명이 신민당으로 옮겨갔다. 그 바람에 신민당이 103석으로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넘겼다. 국회 개원을 요구하고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의석수다. 더욱이 신민당은 돌아온 정치 9단 양김이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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