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없는 전쟁에 염증, 피 대신 문화국 귀화

2025-01-09

일본 장수 사야카는 왜 김충선이 됐나

일본인 사야카(沙也可)는 스무살 남짓의 나이에 조선 정벌의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한다. 본격적인 침략군에 앞서 척후병으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온 좌선봉(左先鋒) 사야카는 상륙한 지 이틀 후 1592년 4월 15일에 조선의 백성들에게 효유서(曉諭書)를 돌린다. “조선 백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하시고 절대 동요하지 마시오. 나는 왜장으로 왔지만 당신 나라를 공격할 뜻이 없고 당신들을 괴롭힐 뜻이 없소이다. 나는 본디 동토(東土, 조선)가 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들은 바 한 번 와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구경하러 조선에 왔다는 그는 닷새 후인 4월 20일에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강화서(講和書)를 보내 조선으로 귀화할 뜻을 전한다.

임란 선봉장 일주일 만에 결심

조총·화포 제조법 전수 혁혁한 공

“성은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여진족 방어 공로 정2품 올라

우록김씨 시조, 일가 이뤘지만

말년에 육친 그리움 토로도

이순신이 화포 제조법 문의

사야카에 의하면 자신의 귀화는 지혜가 부족하거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재능이 모자라거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또 군사가 정예가 아니거나 무기가 불리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조선에서 펼쳐지는 예의문물의 아름다움과 의관풍속의 번성함을 우러르며 예의지국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일본 무장들이 대의명분은 고사하고 자신의 권력 확장을 위해 조선을 침략하는 행위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항왜(降倭)의 수는 적게는 1000에서 많게는 1만에 이른다고 한다. 적지 않은 수의 귀화인들에서 유독 사야카에 주목하는 것은 조선인으로 산 50년의 역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자아실현인 동시에 자신이 꿈꾼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를 구체화하는 의지와 실천의 여정이었다.

왜장으로서 조선의 신민이 된 사야카는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상응하는 성과를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귀화 직후인 1592년 9월 그는 동래와 양산의 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4월에 국왕 선조는 권율 장군의 주청으로 그에게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벼슬을 내린다. 일본인 사야카가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조선의 무반 관료로 편제된 김충선은 임진왜란 동안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을 뿐 아니라 조총(鳥銃)과 화포 제조 기술을 전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총과 화포 제조법을 묻는 이순신 장군의 편지에 이미 제조해서 쓰고 있다는 김충선의 답장(‘答統制使李公純臣書’)에서 보듯 임진왜란에서 그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자 김충선은 서른의 나이로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을 하고, 그 이듬해에는 대구도호부 우록동(友鹿洞)에 집을 지어 정착한다. 당호를 모하당(慕夏堂)이라고 하여 중하(中夏) 문명의 신봉자임을 분명히 했다. 조선을 제2의 고국으로 선택한 것도 중하적 문화가 실천되는 소중화(小中華)의 사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거(安居)를 누릴 새도 없이 그는 북로(北虜, 여진족)의 침입으로 어수선한 북방 방어를 자원하는 ‘잉방소(仍防疏)’를 올리고 변방으로 향한다. “신은 국외의 천한 포로로 두 조정(조선과 明)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성덕을 갚고자 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 한 몸으로 장성(長城)을 삼고 한 자루의 칼로 백만 병(兵)을 대적하여 오랑캐를 멀리 내쫓고, 내 나라를 받들어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잉방소’) 1613년에 우록동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10년 동안 변방에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그 공으로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의 난에서도 공을 세우는데, 그 대가로 사패지를 받게 되자 나라(守禦廳)에 환납하는 결정을 한다.(‘환사패소·還賜牌疏’) 사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재물보다는 사람됨의 가치를 중시한 그의 인생관은 자녀 교육에 그대로 이어졌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도 눈여겨 볼만하다. “항왜 장수 김충선의 사람됨은 용기가 출중할 뿐 아니라 성품 또한 공손하고 신실하다.”(‘승정원일기’ 인조 6년)

부모형제 두 아내 저버리고 귀화

김충선의 자전적 기록에 의하면, 동토(東土)의 예의방(禮義邦)을 구경할 겸 흔쾌히 부대의 선봉장을 맡으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결심을 한다. 부모님 산소에 하직 인사 올리고 친척들과 일곱 형제 그리고 두 아내와 이별하는데, 그 슬픈 마음 서러운 정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섬 오랑캐(島夷之人)’로 일생을 마치느니 대륙인 중하(중국)나 동토(조선)에서 문화인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는 조선에 상륙하여 귀화를 청할 때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예의의 나라 동방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나라에 자손을 남겨 예를 아는 수준 높은 가문을 만드는 것이다.(‘녹촌지·鹿村誌’) 물론 김충선이 학술과 지식 욕구가 남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문화적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고국을 버리고 타국을 선택했다는 것에는 뭔가 미진한 감이 있다. 당시 일본 사회는 힘이 지배하는 반문명의 상태로 침략 전쟁을 자행하는 권력가들의 야욕에 염증을 느낀 그룹이 팽팽했음을 관련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년 사야카도 이러한 일본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충선은 인동 장씨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고 그들로부터 25명의 손자녀를 얻었다. 생전에 이미 자손 30명을 이끄는 가족 대표로 그들을 교육할 교재로 가훈(家訓)을 짓는다. 그 핵심 내용은 이런 것이다. “효제충신을 업(業)으로 삼고 예의염치를 가풍(家風)으로 하여 자자손손 서로 전하며 화목하게 지내라, 부귀영달을 탐하지 말고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갈고 닦으라. 재물(財物)로 가족 관계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인문 가치를 실천하는 가족 공동체를 지향하며 대대손손 전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구상은 혈연 가족에 국한되지 않고 우록동 주민에도 눈을 돌리는데, 그 화합과 상부상조의 방법들을 15개 조의 조약(條約)에 제시했다. 가훈과 조약을 비롯하여 조선의 명사들과 교환한 서신들, 시(詩)와 가사(歌辭) 등의 문학작품, 그를 기리는 후손들의 글이 『모하당문집』(규장각 소장)에 실려있다.

김충선이 뜻한 바 그를 시조로 한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 또는 ‘우록김씨(友鹿金氏)’의 가계와 가풍이 형성되고 전해졌다. 이 가문에서 많은 인재가 나왔을 뿐 아니라 김충선을 배향한 녹동서원 인근에는 현재까지도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김충선도 인정한 바 50년 조선인의 삶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다만 두고 온 고국의 가족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들 김경원이 지은 ‘행록’에 의하면, 조선 참전 후에는 일본에서의 일을 말한 적이 없고 씨족의 내력을 말한 바도 없었다. 다만 건너올 때 소지한 신묘년(1591)의 호적에 부친 사익(沙益)을 비롯 조부와 증조부의 성명이 나와 있었다. 김충선은 여덟 형제의 막내였다.

친일과 반일 너머 김충선의 삶

“남풍이 불 때면 고국이 생각나니 선분(先墳)은 평안한가 칠형제 무사한가. 지친골육들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간운사(看雲思) 춘초몽(春草夢)이 어느 때인들 없을까마는 국가에 불충하고 사문(私門)에 불효되니 천지간 죄인이 나밖에 또 있는가. 아마도 세상의 흉한 팔자 나뿐인가 하노라.”(‘모하당술회·慕夏堂述懷’)

죽음을 앞둔 칠순의 무장(武將) 김충선(1571~1642)은 두고 온 고국과 형제들의 소식에 애가 닳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나온 고국이지만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은 의지로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친일과 반일의 이념, 그 너머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면 김충선이 조선을 보는 시선도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