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온고지신] 부끄러운 시간

2025-01-08

1910년 8월 29일.

조상들은 그날을 왜 망국(亡國)의 상실과 분노, 거대한 슬픔의 날로 규정하지 않고, ‘국치(國恥)의 날’이라고 천명했을까. 그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날도 우리는 모두가 그날을 ‘크게 부끄러운 날’로 상기한다. 참으로 특별하지 않은가.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날, 무너진 가슴을 안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가장이 빈 쌀독을 바라보면서, 그는 가족이 조만간 다 함께 굶어죽을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기 전에, 그보다 더 먼저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였다. 조상들은 그런 족속이었다.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나는 조상들의 그 특별한 마음을 늘 불행 중 ‘다행스러운 자산’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뿌듯해했다.

강도에게 가진 걸 모두 털린 사내는 우선 목숨이라도 건진 것을 조상의 음덕(陰德)이라 여기고, 정신 차리고 나서 그 상실을 아까워하고 분노하고 두려움에 떨며 걱정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맨 먼저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 일제 35년은 이 민족이 그 ‘큰 부끄러움’을 줄이고 또 줄여서 끝내 제로로 만들려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망국의 슬픔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공동체의 정신으로써, 그리고 국권회복의 목표를 위해서도 그 수치심은 강력한 에너지였다. 큰 지혜이기도 했다. 이 민족이 세상에 보여준 고결한 자존감이었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왜놈들과 탐관오리들에게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새끼들에게 그 모욕적인 신분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수십만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저 북만주로 피난을 떠났다. 그 생계형 이주민들이 훗날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성으로 내놓은 푼돈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으로 쓰이는 과정을 생각하면 언제나 뭉클하고 눈물겹다.

그 조상들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생활을 현저하게 개선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과 아쉬움, 일상적인 불안을 늘 곁에 두고 살면서도 듬직하게 정착했다. 그 억척스런 살림살이와 특유의 생존력으로 살아남은 세월은 훗날 간도를 국권회복을 위한 베이스캠프로 건설하는 위대한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특별한 부끄러움은 ‘경술국치’(1910년) 300여 년 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게 낸 출사표에서도 확인된다. “원컨대 한번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즉시 범의 소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기운을 쓸어내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일이나마 씻으려 하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나라가 망하거나 그 조짐이 보일 때 그 특징은 예외 없이 발현된다. 두드러진다. 각종 동식물들의 종(種)이 ‘존재의 위기’에 처하면, 몸의 색깔을 바꾸거나 특정물질을 분비하여 위난(危難)을 돌파하듯이, 우리 민족은 마치 그 자연법칙처럼 ‘부끄러움’을 생존에너지로 치환하여 뛰쳐나갔다.

왜란(倭亂) 때도, 호란(胡亂) 때도, 경술국치 망국 전후 그 지옥의 시간에도 늘 똑같았다. 윗자리에서 군림하며 거들먹거리던 종자들, 심지어 임금까지도 시정잡배들처럼 도망쳤지만, 민초들은 낫과 쇠스랑, 돌팔매와 죽창과 활로 신식무기와 맞서고, 여인들은 치마에 돌맹이와 먹거리를 날랐다. 아들은 총맞아 죽은 어미의 젖을 빨았다. 국난 때마다 조상들이 그렇게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철학자 맹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무수오지심 비인야. 無羞惡之心 非人也), 라고 갈파했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 겸손하고 친절한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지니고 살지 않으면, 그 역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실로 단순명료한 인간론이다.

60대 중반 넘도록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언제나 존경스러워 본받고 싶은 인사들 소수가 있었다. 그들은 늘 부끄러운 일을 경계했다. 그들과 대칭에 있는 자들의 공통점은 후안무치(厚顔無恥)였다. 특히 돈 앞에서 저열하고 쌍스러웠다. 기자와 정치판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천박한 모리배(謀利輩)들이었다.

자존감 높은 족속은 부끄러움과의 싸움에서 가장 질긴 법이다. 그 과정에서 기나긴 시간 동안 크고 작은 고통과 절망의 기억들이 쌓이고 또 쌓인다. 이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공동체는 그렇게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의 선물이다. 목숨을 던져 얻은 고품격이면서 큰 지혜다. 이 미덕을 귀한 가보(家寶)처럼 이어간다면 그것이 이 특별한 민족의 유전자로 내장될 것이다.

12.3 계엄사태 이후, 이 나라 착한 씨알들,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비폭력 저항운동은, 이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먹구름처럼 짙게 드리워진 음울한 시대에 밤하늘에 쏘아올린 조명탄이다. 그 위대한 민초들 앞에서 윤석열 일당, 그 한 줌도 안되는 5류 정치낭인 무리가 보여주는 야비하고 졸렬한 작태는 이 특별한 공동체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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