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璟界)

2025-01-09

김길웅, 칼럼니스트

어둠과 밝음의 경계, 밤과 낮의 경계, 나라와 나라의 경계, 남과 북의 경계, 아이와 어른의 경계, 불교와 기독교의 경계, 유정과 무정의 경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 도시와 시골의 경계…. 경계는 자연현상과 시간, 혹은 문명이나 문화의 편차가 빚어내겠지만 사유와 철학, 정서나 환경 혹은 심미적 탐구의 산출물이기도 하다.

사람은 평생 앞에 놓인 무수한 경계를 넘으면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 연마하고 도전하고 고뇌하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탁월한 수월성으로 단숨에 뛰어넘기도 하나, 성채처럼 버티고 선 경계 앞에 시도 뒤, 수없는 시행착오로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광막한 사막은 횡단하려는 자에게 특별한 가시적 경계가 없다. 뒤덮인 모래 위를 몰아치는 열사의 모래바람이 경계로 놓여 있을 뿐이다. 전체가 벽인 사막의 한복판, 한 조각 풀잎을 만나기 위해 내딛는 필사의 걸음걸음이 경계를 허무는 그 걸음이다. 사막의 밤엔 별이 쏟아져 내린다.

경계는 허물려는 자에게만 존재한다. 허물기 위해 존재하는 게 경계일 것이다. 세상이 삭막하다 하나 아직도 시골 이웃 사이 수숫대 삽짝은 낮다. 그냥 툭툭 얹고 세워 놓았을 뿐 이웃 간에 막힘없는 소통이 슬겁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닌, 눈빛으로 주고받으니, 장애가 아니다. 인정이 자분거리는 바자울!

요즘 눈에 띈다. 성탄절에 사찰의 축하 메시지가 교회 앞에 나부끼고, 부처님 오신 날 산문에 교회의 경축 현수막이 나붙는다. 종교 간에 경계를 허무는 아름다운 영혼의 따뜻한 소통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붕긋 부풀어 오른다. 까만 옷의 수녀님과 머리 푸르스름한 비구니스님이 손 맞잡고 하얗게 웃는 모습은 바라보는 눈길을 시리게 한다.

아잇적 천진무구를 잃지 않아야 한다. 어둠 뒤에 밝음이 오고, 밤은 오래지 않아 낮으로 이행한다. 저승을 생각하며 이승을 살지 않는다. 저승을 잊고 사는 이승이다. 늘 이승이라고 살다 보면 어느덧 저승을 기웃거리게 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골과 도시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아득바득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다. 속력만이 절대 선은 아니다. 속도에서 떠나 느리게 사는 이치를 터득하면 되는 일,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경계의 벽이 아닐까.

허물어야 할 이념의 벽이 있다.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국, 남북의 경계를 넘는 것. 독일은 해냈는데 아직도 우리는 허물지 못하는 분단의 높은 벽 앞에 서 있다. 민족의 힘으로 허물어야 할 경계다.

앞마당이 연년이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펼친다. 몇 년 전, 채송화를 꺾꽂이했더니 색의 혼합이 경이롭다. 처음 핀 꽃이 홍‧황‧백이었는데 이내 주홍 주황 분홍으로 분화하며 색의 영역을 넓힌다. 놀랍게 보라색이 합류한다. 빨강과 파랑의 간색이 보라다. 파란 꽃이 없는데 보라색이라니. 자연은 이미 색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다들 변한다. 변하면서 진화한다. 경계를 허물며 끌고 온 게 역사다. 그럼에도 종교 간의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지는 폭탄테러, 나라 사이의 소유 다툼이 일촉즉발의 형국으로 초긴장을 부른다. 그러나 풀어야 한다. 경계는 허물 수 있는 벽이다. 높아만 가는 경계를 바라보는 인간에게 내릴 신의 선택은 무엇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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