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있게 보낸 한글날

2024-10-23

10월 9일 한글날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뜻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는지도 알려주고, 순우리말을 쓴 책들도 읽어준다.

한글이 얼마나 귀한 글인지 알려주는 그림책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심히 읽지만, 아이들은 따분한 국어 수업일 뿐이다. ‘그래! 겪는 게 제일 큰 공부지.’ 한글날에는 학교가 쉬니, 전날 아이들과 ‘우리말과 우리글’을 몸소 겪어본다.

처음은 한글이 쓰여 있는 옷 입고 오기. 학교에 오자마자 내 책상 앞으로 긴 줄이 생겼다. “선생님, 저 작년 반티(반에서 맞춘 티셔츠) 입고 왔어요. 이거 한글 맞죠?” “아, 우리 엄마는 그거 버렸는데…….” “선생님, 저는 아무리 찾아도 영어 밖에 없어서 못 입고 왔어요.” 그 때 조심조심 다가오는 세은이는 겉옷을 열며 합기도 도복을 보여준다. 멋진 한글 옷을 입고 왔으니, 맛난 간식 하나씩 던져준다.

다음은 ‘우리말만 쓰기’ 하루 동안 외국말을 쓰지 않고, 순우리말, 배달말만 쓴다. 잘못해서 외국말을 말하면? ‘5번 넘게 쓰면 남아서 교실 청소, 선생님은 3번에 간식 1개씩 주기’란 규칙을 만들었다.

시작하자마자 아이들에게 “나도 한글 티셔츠 가지고 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아이들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어??!!” 한다. 앗!! 벌써 1번 걸렸다. “말을 많이 하는 내가 더 불리하다구!” 아이들에게 사정해도 어찌나 차갑게 규칙대로 하라고 하던지. 2교시 과학시간에는 책을 미리 보며 속으로 연습한다. 환경오염을 공부해야 하는데, 태블릿으로 조사해야 한다. 태블릿이란 말도 하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미리 공부할 내용을 훑어보며 ‘플라스틱, 캔, 페트병’ 이런 거 절대 말하지 말자 다짐한다. 수업하는데 컴퓨터가 말썽이다. “왜 오늘따라 인터넷이 느리냐!” 무심코 뱉은 말에 또 아이들이 “어어!!??” 이런!! 아이들은 한결같이 “오늘은 말을 적게 해야겠어.” 다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기분 좋을 때마다 나오는 ‘나이스’, 알겠다고 말하는 ‘오케이’ 다들 지뢰밭이라며 몸을 사린다. 점심밥을 먹을 때도 ‘소스, 돈가스, 치킨, 파이’를 말했다면서 속상해한다. 점심시간에 늘 하던 대로 “보드게임하자!” 외치고 나서 또 아차차차!! 루미큐브, 조커, 카드 모두 외국말이다. 결국 아이들은 반절 넘게 청소 벌칙에 걸리고, 난 20번이 넘게 말해 간식통을 다 털어야 했다.

아이들은 답답하다며 힘들단다. 이렇게 외국말이 우리말에 많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란다. 어디 영어뿐이랴? 중국글자말이 다 우리말을 잡아먹고, 요새는 이상한 유튜브말, 줄임말, 신조어까지 생긴다. 말과 글은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 삶까지 영향을 끼친다. 쉽고 깨끗한 말과 글로 누구나 말하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번 일로 우리반 아이들이 우리말과 글(배달말과 한글)을 귀하게 여겼으면 한다.

홍은영 <전주인후초 교사>

저작권자 © 전북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