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원소는 어떻게 차별의 도구가 됐나

2025-11-28

주기율표 아이러니

김명희 지음

낮은산 | 288쪽 | 1만9000원

깨진 온도계에서 나온 은빛 액체가 책상 위를 또르르 굴렀다. 마법에 홀린 듯 손을 뻗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외쳤다. “만지지 마!”

이 물질은 ‘퀵 실버’라는 별명의 수은(水銀). 원소기호 Hg 또한 물(hydor)과 은(argyros)을 붙인 라틴어 hydragyrum에서 왔다. 연금술사들이 붉은색 황화수은 광석을 태워 얻던 수은은 참 쓸모가 많았다. 밀도와 표면장력이 높아 압력 측정에 편했고, 형광물질을 바른 유리에 증기 형태로 넣으면(형광등) 세상이 밝아졌다.

1987년 12월 서산에서 상경한 15세 문송면군은 압력계·온도계 공장에 취직했다. 1월부터 불면과 두통에 시달렸건만, 3월 중순에야 수은중독 진단을 받았다. 회사는 산재 신청서 날인을 거부했고, 노동부는 산재보험 미지정 의료기관 진단 등을 이유로 산재 신청을 반려했다. 스위치만 켜면 세상을 밝히던 퀵 실버는 빠르게 소년의 생명을 꺼뜨렸다.

우리 몸에 8번째로 많은 원소 황(S)은 인류 첫 항생제 페니실린의 주요 성분이다. ‘친환경 섬유’라던 레이온을 만들 때 사용된 이황화탄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단 사실은 1900년대 초중반에 유럽과 북미를 관통했다. 하지만 후진국에 재빨리 전달된 건 선진국의 연구 결과가 아니라 금지된 생산설비였다. 일본에서 가동이 전면 중단된 동양레이온의 설비가 한국으로 건너왔고, 1991년 137일간의 ‘장례투쟁’을 부른 원진레이온 설비는 그대로 중국에 매각됐다. 석면과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각 나라 언어로 쓰인 건강 독성 연구 논문의 양이 설비의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예방의학과 보건학을 전공하고 노동건강연대에서 활동해온 사회의학자가 우리 삶과 밀접한 18개 원소의 쓸모가 어떻게 불평등과 차별의 도구로 작용했는지 조명한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서 영감을 받아 개인사와 인류 역사가 촘촘히 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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