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정부 출범과 함께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정부는 실용주의에 기반한 대북 접근을 통해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대결이 아닌 공존의 미래를 열겠다는 국정 철학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남북이 다시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가장 깊이 체감해 온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탈북민은 늘 남북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남북관계가 악화하면 도발을 일삼는 북한 정권과 동일시되며 편견과 거리감의 대상이 됐고 관계가 개선될 기미가 보이면 조심스럽게 침묵해야 했다. 이들은 주로 북한 인권 침해의 증언자이자 국제사회에 북한 실상을 알리는 ‘투사’, 국내외 연구자에게 북한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 제공자’로 한정된 역할을 부여받아 왔다.

그러나 이제 탈북민의 사회적 역할은 거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 대량입국이 본격화된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탈북민 사회도 크게 변화했다. 변호사, 박사, 교수, 의사, 한의사, 약사, 법무사, 산업기사 등 다양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개인의 정착을 넘어 사회적 기여를 모색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감정은 종종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이어진다.
이제 탈북민의 삶은 단순한 적응과 생존을 넘어 고향과 미래를 향한 실천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실제로 한 탈북민 단체는 10년 전에 “북한 개발연구는 떠나온 고향에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슬로건 아래 공간정보를 활용한 고향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이 있다. 탈북 출신 석박사와 과정생 10여명은 이 프로젝트에서 각자의 고향을 중심으로 산업, 의료, 교육, 공공시설에 대한 위치정보를 수집하고 공간정보 기반의 개발 방향을 제시했다. 참가자들은 매달 공공기관 회의실에 모여 공간정보 분석 기법을 배우고, 세미나를 통해 성과를 공유하며 진지하게 연구에 임했다. 필자 역시 참여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에 대한 죄책감과 희망을 안고 기쁘게 이 연구에 함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노력은 민간 차원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정부는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이라는 상징적 존재로 재조명하고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협력 정책 수행의 실질적 동반자로 세워야 한다. 단순한 보호와 지원을 넘어 탈북민이 통일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다음과 같은 포용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첫째, 대북·통일정책 수립 과정에 탈북민 자문 참여를 제도화하고, 둘째, 북한 지역개발 및 남북협력 사업에 이들의 경험과 전문성을 반영하며, 셋째, ‘평화 퍼실리테이터(조력자)’ 양성 등 통일 대비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역할 전환은 단지 정책 차원의 활용을 넘어 탈북민 스스로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책임감을 실현하며 자기 삶의 의미를 확장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착을 넘어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데 탈북민이 그 징검다리를 함께 건널 수 있도록 사회와 정부 모두가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
김영희 동국대 북한학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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