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공장 사라지면 혁신도 사라져…제조업 강화에 국운 걸어야”

2025-11-03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1%대로 떨어지면서 한국 경제가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피크 코리아’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주력산업의 성숙 단계 진입, 중국 공세 등으로 인해 후발 추격형 성장 모델이 한계에 이르렀는데도 지난 20여 년간 창조적 파괴를 통한 신산업 발굴 작업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기술경영경제정책 대학원 전공 교수는 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조업은 기술 혁신의 배양터이자 우리의 핵심 역량으로 모든 산업 정책의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며 “인공지능(AI)을 결합해 제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주52시간제의 탄력적 적용을 비롯해 제조업 친화적인 정책은 뭐가 됐든 다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AI 기술은 한 국가의 순위를 바꿀 만한 거대 조류”라며 “AI 기술 개발 자체보다 기존 사회 관행이나 조직 문화를 AI 시대에 맞게 바꾸는 게 더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여러 시행착오 속에서도 혁신을 위한 ‘축적’ 경험을 쌓고 있다고 보는가.

△올해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필리프 아기옹 런던정경대(LSE) 교수의 이론은 간단하다. 창조적 파괴가 원활한 산업 생태계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낡은 세포가 빠져나간 자리를 새로운 세포가 채우는 것이 창조적 파괴다. 한계기업은 퇴출되고 능력 있는 기업이 탄생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산업이나 기업들이 등장한 사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처럼 활활 타오른 용광로 국가는 보기 힘들었다. 문제는 내일을 위해 오늘 씨앗을 뿌리고 있느냐 여부다.

-‘문제 해결자’가 아닌 ‘문제 출제자’로의 전환을 강조해 왔는데.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로켓 추진체를 재활용한다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우주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사람들이 거대한 분야로 성장할 최초의 씨앗이 될 도전적 문제, ‘그랜드 퀘스트(Grand Quests)’를 던져야 한다. 그 다음에는 실패를 축적해 해답을 찾는 ‘스케일업(scale-up·지속적 개선)’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성세대보다 더 똑똑한 젊은 세대에게 답이 있다고 본다. 그들에게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도전 정신을 잃었다는 비판이 많다.

△선진국 제품을 벤치마킹해 타당성 평가를 거쳐 대규모 투자를 통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성공 전략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중국이 더 잘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이 하고 있지 않는 분야를 탐색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시점이 됐다. 세상에 없는 지도를 만들고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신사업을 하려면 후발 추격형 투자 결정과 경영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 모르는 땅을 탐험하는 데 빅베팅을 할 수는 없다. 스몰 베팅을 자주 하면서 그 결과를 본 뒤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전략을 체화해야 한다.

-우리 경제 규모를 봤을 때 모든 제조업을 다 잘하기는 힘들다.

△현대 기술들은 다 짜맞추기 구조로 돼 있다. 코로나19 백신은 동유럽 출신들이 핵심 원리를 발견하고 영국·인도 등에서 제조했다. 반도체만 해도 완제품 하나 나오려면 원료부터 시작해 국경을 70번 넘어야 한다. 특정 국가가 반도체 산업을 한다는 것은 퍼즐 하나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주권은 세계 유일의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 제조사인 ASML에서 나온다. 우리도 다른 나라가 대체 불가능한 부분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중국이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초과학과 응용 기술의 미래 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학술 논문, 특허권 지표에서 이미 중국은 미국을 추월했다. 중국은 5세대(5G) 이동통신 국제표준에 반영될 만한 핵심 특허의 42%가량을 갖고 있다. 국제표준 제안 건수도 중국이 압도적이다. 일단 표준을 장악하면 특허가 붙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기업이 중국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우려된다.

-우리나라 연구개발(R&D) 전략도 ‘후발 추격형’ 성장에 맞춰져 있다.

△정치 분야와 마찬가지로 ‘1987년 R&D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박정희 정부 때는 전자·기계·석유화학 등 산업 발전을 위해 토지·자본·인력 등 국가적 자원을 특정 기업들에 몰아줬다. 그러다 정부는 1986년 공업발전법 시행 이후 기업들의 산업 진입과 퇴출 결정 권한을 포기하는 대신 기업에 도움이 되는 R&D 지원으로 방향을 바꿨다. 반도체·코드분할다중접속(CDMA)·디스플레이 등의 기술이 그 결과물이다. 하지만 산업 기여도가 평가 잣대였기 때문에 실패가 용납되지 않았고 단기 성과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 선도형 국가가 되기 위한 R&D 정책 방향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정부 R&D는 산업 응용 기술 위주다. 반면 미국 정부의 R&D는 밑단인 기초과학과 상단인 국가 미션 등 2개로만 돼 있다. 국가 미션은 국방·보건·환경 등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기술과 관련돼 있다. 인터넷·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터치스크린·배터리·AI 등 우리가 놀랍게 생각하는 기술들의 뿌리는 모두 미국의 국방 연구에서 출발했다. 우리도 다른 선진국처럼 정부가 기초과학과 국가 미션 R&D를 강화하고 기업들이 기술들을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 산업의 씨앗이 될 파괴적 혁신이나 창조적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한국형 기술 주권’ 전략은 어떻게 짜야 하나.

△자주 독립형 기술 주권은 망하는 길이다. 모든 기술을 자체 개발하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거니와 2류 기술이 ‘국산’이라는 이름 아래 대우받는 결과를 초래한다. 폐쇄적 기술 주권이 아니라 협력적 기술 주권이 필요하다. 퍼즐판에서 핵심 퍼즐을 하나 갖고 있으면 다른 플레이어가 배신하지 못한다. 독자 핵심 기술을 보유(own)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와 협력(collaboration)하고 필요한 기술에 접근(access)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른바 ‘OCA’ 전략이다.

-미중 간 전략 경쟁이 치열하다.

△‘노잉(knowing·알기)’과 ‘두잉(doing·하기)’은 사람과 그림자처럼 뗄 수 없는 관계다. 물리·화학 이론을 잘 알면 뭐 하나. 직접 만들어 봐야 뭐가 틀린지 알 수 있고 새로운 공식도 나온다.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제조업을 단순히 일자리 문제로만 판단했던 것이 큰 패착임을 깨달았다. 공장이 사라지면 혁신마저 사라진다. 지금 미국은 중국이라는 큰 적을 만나 첨단산업 분야의 기술 리더십 회복을 위한 첫 단추로 제조업 부활에 미친 듯이 나서고 있다.

-우리에게 시사점은 무엇인가.

△제조업이 없으면 어떤 산업 비전도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AI는 현실이 아닌 비트(bit)로 존재한다. 디지털 세계에서 현실의 아톰(atom·원자) 세계로 가져오려면 물리적인 몸을 가져야 한다. 양자 컴퓨팅도 뒷받침할 수 있는 서버가 있어야 한다. AI와 제조업의 결합도 제조업을 살리기 위해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AI 기술 자체는 제조업 성장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다. 제조 역량이 우리의 핵심 기반이다.

-이재명 정부가 ‘AI 3대 강국’을 내세우고 있다.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AI라는 거대한 조류는 이제 막 등장해서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과거 250년간의 역사를 보면 증기·전기·디지털 등과 같은 범용 기술은 한번 오면 약 50년에 걸쳐 한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 범용 기술과 다른 분야와의 결합을 얼마나 빨리 해내느냐에 따라 국가 순위가 바뀌었다. 1990년대부터 떠오른 디지털 기술에 성공적으로 올라탄 나라가 한국이다. 반면 일본은 대응에 실패하면서 경제력이 뒤처졌다.

-AI 시대를 맞아 향후 과제는 무엇인가.

△반도체·바이오·유통·미디어 등 각 산업은 물론이고 교육·행정 등 모든 분야에 최대한 빠르고 깊숙하게 AI 기술을 접목시켜야 한다. 그 성패에 따라 도약이냐 후퇴냐가 좌우될 것이다. 챗GPT·딥시크 등과 같은 뛰어난 생성형 AI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기술 개발보다 기존 관행이나 조직 문화를 바꾸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부에서는 정책 결정권자 중에 문과 출신들이 많아 과학기술 발전이 더디다고 말한다.

△문·이과 전공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리더는 물론 국민 모두가 과학적 사고방식, 합리주의를 얼마나 받아들이냐가 더 중요하다. 과학적 사고방식이란 자신의 가설이 틀릴 수 있고 언제든 후배들의 새로운 가설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진국이 과학 혁명을 통해 얻게 된 보편적 상식이다. 반면 일부 정치 담론들을 보면 가설 검증이 불가능한 도그마(독단적 신념이나 학설)에 가깝다. 큰 목소리의 자기 주장만 난무하는 사회적 풍토에서는 그랜드 퀘스트를 던지기 어렵다.

◇ He is…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계성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자원공학과 학·석·박사를 마쳤다. 1999년부터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 대학원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공학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다.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한국경영학회 회장, 옥스퍼드 저널인 ‘과학과 공공정책’ 편집장,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경제과학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산업과 과학기술 분야를 아우르는 통찰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 ‘최초의 질문’ ‘그랜드 퀘스트’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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