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 아래 모래밥 먹으며 밤낮 공사…해외건설 1조달러 불씨됐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54>]

2025-11-25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54> 중동 건설 붐

1997년만이 아니었다. 74년에도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원인은 세계를 덮친 1차 석유파동. 유가가 천정부지로 뛰어 수입액은 확 늘었는데, 글로벌 경기가 가라앉아 수출은 부진했다. 74년 무역수지는 24억 달러 적자였다. 외환보유액이 고작 10억 달러였던 당시 한국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규모였다. 또 다른 달러 획득 창구였던 베트남 전쟁 특수도 사라졌고, 대일청구권자금(66~75년) 역시 끝물이었다.

그 와중에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설비를 사들일 달러가 필요했다. 사면초가에 설상가상이었다. 오원철 당시 청와대 제2경제수석은 저서 『한국형 경제건설 6』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은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홍콩에서 돈 꿔오겠다는 건 해결됐나” “원유 대금은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해” 등등이었다. 꼭 회사 사장이 부도를 막느라고 전화하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은 이 위기를 스스로 극복했다. 석유파동을 일으켰던 중동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건설 진출이었다. 중동 때문에 겪게 된 외환위기를 중동에서 달러를 벌어 해결한 것이었다. 이때 본격화한 한국의 해외건설은 지난해 누적 수주 1조 달러를 기록했다. 수출 누계 1조 달러는 반도체·자동차에 이어 건설이 세 번째다.

한국이 처음 해외 건설을 수주한 것은 65년 태국이었다. 현대건설이 98㎞ 길이의 2차로 고속도로를 540만 달러에 따냈다. 그 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우리 건설 회사들이 활동했다. 하지만 모두 수십만~수백만 달러 정도의 소규모 사업이었다.

중동 진출 1호는 삼환기업이다. 73년 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000만 달러짜리 고속도로 사업을 수주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함께 일했던 이탈리아 회사가 “중동에 진출해 보라”고 권유하며 관련 정보를 줬다. 삼환기업의 시공 능력을 인정한 것이었다(『박정희 시대와 중동 건설1』, 정성화).

달러 때문에 고심하던 정부가 이 소식을 들었다. 마침 정부도 “중동이 오일 달러를 갖고 건설 사업을 엄청나게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일본에서 들은 참이었다. 오원철 수석은 74년 초 중동 진출 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며 “우리에게 세 가지 장점이 있다”고 했다. “첫째, 중동은 환경이 척박해 선진국 인력은 가려 하지 않지만,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둘째, 인건비는 선진국보다 훨씬 싸고 기술은 후진국보다 월등합니다. 셋째,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빨리 공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곤 덧붙였다. “지금까지 어린 여성 근로자가 수출을 해서 경제를 지탱했습니다. 이젠 남성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정부가 전방위 지원에 나섰다. 중동의 공사 발주 정보를 수집했다. 74년 4월에는 장예준 상공부 장관을 대표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첫 각료급 사절단을 보내 건설·기술·국방 등 포괄적 협력을 논의했다. 박정희는 건설부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불러 “철저히 감독해 부실 공사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덤핑 입찰을 못 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한국 근로자 특유의 근면 성실함에 정부 지원이 더해져 수주가 잇따랐다. 74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시 근처의 도로공사를 하던 삼환기업은 준공을 앞당겨 달라는 요청에 밤에 횃불을 켜고 24시간 3교대로 작업했다. 이를 본 파이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저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공사를 더 줘야 한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횃불 신화’로 알려진 얘기다.

“섭씨 50도…찬물 들이켜도 갈증 그대로”

76년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을 9억3000만 달러에 따냈다. 당시 한국 정부 연간 예산의 25%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중동 건설 계약액은 쑥쑥 늘어 77년 34억 달러, 81년 127억 달러를 기록했다. 83년엔 동아건설이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33억 달러에 수주했다.

한국은 시공 기술로도 인정받았다. 다음은 주베일항 안벽(항만에서 배를 대는 부분) 공사 책임자였던 정천범(87·사진)씨의 증언이다. “근처에서 네덜란드도 항만 공사를 했다. 우리가 블록으로 쌓은 안벽은 자로 그은 듯 고르고 똑바른데 그들은 삐뚤빼뚤이었다. 네덜란드와 사우디아라비아 관계자들이 우리 안벽을 사진 찍어 가기도 했다.”

근로자들은 고된 환경을 버텨냈다. “섭씨 50도에선 찬물을 들이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물이 효과가 있어 모두들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정천범) “모래 폭풍이 불면 고운 모래 먼지가 테이프를 바른 식당 창틀을 뚫고 들어왔다. 그럴 땐 밥에 물을 붓고 흔들어 모래를 가라앉히고서 먹어야 했다.”(권혁찬·70·리비아 대수로 공사 참여) 건설 노동을 하기에 혹독한 환경이었지만 국내의 2~3배에 이르는 임금이 ‘당근’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은 중동 건설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였고 부지런함과 ‘빨리빨리’ 이미지를 구축했다. 82년엔 중동에서 미국에 이어 건설 2위를 기록했다. 건설사들은 중동에서 번 돈으로 국내에서 부동산을 개발해 안팎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중동 건설은 한국의 외교까지 바꿔 놓았다. 당시 외교부 경제협력과장이었던 신두병(89) 전 이탈리아 주재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중동에 진출하기 전에 한국 외교는 세 가지였다. 북한에 대항할 지지 세력을 얻는 비동맹 외교, 박동선 게이트(70년대 미국 의회를 대상으로 불법 로비를 한 사건) 같은 일이 터졌을 때 뒷수습하는 소방외교, 대사관별로 할당된 수출 목표를 채우는 수출외교다. 그런데 중동 건설을 지원하면서 자원외교와 더불어 다방면을 아우르는 경제협력 외교가 싹텄다.”

해외에서 초대형 토목·건설 공사를 하고 국내에서 63빌딩 등을 올리면서 건설사들은 기술을 착착 키웠다. 우리 손으로 랜드마크를 세우게 됐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828m)와 둘째인 말레이시아 메르데카 118 빌딩(679m)은 삼성물산이 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4.6㎞)인 터키 차나칼레 대교는 DL E&C와 SK에코플랜트의 공동 작품이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 올해는 체코에서 ‘플랜트 건설의 끝판왕’이라는 원전 건설을 수주했다. 현재 한국은 해외건설에서 중국·프랑스·스페인·미국에 이어 세계 5위다.

K컬처·의료 융합한 도시사업 모델 개발

부침도 겪었다. 초기엔 중동 의존도가 심해 국제유가가 떨어지면 일감이 확 줄었다. 이제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북미·유럽 같은 선진국으로도 진출하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는 북미·유럽 비중이 25% 선을 넘나든다.

글로벌 경쟁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2010년 715억 달러를 수주했던 해외 건설 실적은 최근 300억~400억 달러를 오간다. 2010년대 초반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고 몸집을 키우려 마구잡이식으로 수주했다가 대규모 부실을 겪은 반작용이기도 하다. 수익성 있는 사업을 고르다 보니 매출 규모가 줄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임금 경쟁력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고, 시공 능력은 중국이 바짝 쫓아오고 있으며, 부가가치가 큰 설계 분야는 아직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손태홍 건설기술·관리연구실장은 “글로벌 트렌드인 ‘투자개발사업’ 역량 역시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투자개발사업이란 건설사가 직접 돈을 마련해 시설물이나 도로 등을 짓고 운영 수익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국내 민자 고속도로 같은 경우다. 손 실장은 “해외 투자개발사업 확대를 위해 자금 동원력과 완공 시설물 운영 노하우를 키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만희 해외건설협회장은 “탄소중립 패러다임에 맞춰 원전과 재생 에너지 인프라 수출을 늘리겠다”며 “외국에서 관심이 많은 한국 문화나 의료기술 등을 도시개발과 융합하는 모델도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코로나 팬데믹’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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