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인잔치 속의 고독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 잔치가 열렸다.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마을의 한 신랑과 신부가 손을 맞잡고 있었고, 하객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계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잔치의 흥이 깨질 순간이었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했다. “포도주가 없구나.” 아들이 무언가 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이 짧은 말씀 속에 얼마나 깊은 한숨이 담겨 있었을까? 어머니조차 자신의 참된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로움. 결혼식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어야 할 혼인잔치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참부모로 오신 독생자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것이 하늘부모님의 본래 뜻이었을까?
하늘부모님의 창조이상은 명확하다. 아담과 해와가 온전히 성장하여 축복받은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참가정을 이루는 것이다(창 1:27-28). 타락으로 이러한 이상이 좌절되었기에, 4천 년 동안 복귀섭리를 펼치시며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본래 목적은 십자가가 아니었다. 신부를 맞이하여 참부모가 되고, 선의 자녀를 낳아 하늘 혈통을 지상에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타락한 인류를 하늘부모님의 직계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실체적 구원,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로마 제국은 이미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놓았다.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공통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 외적 환경은 잘 갖춰져 있었다. 유대 민족은 수백 년간 메시아를 갈망해 왔다. 선지자들의 예언이 생생했고, 민족 전체가 구원자를 기다렸다.
특히 세례 요한은 민중의 절대적 신뢰를 받으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 요단강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했다(요 1:29).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하나 되어 민족적 기반 위에서 신부를 찾아 성혼하여 참부모가 되실 수 있었다.
무너진 기반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례 요한이 의심하며 묻는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 유대 민족이 가장 존경하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자, 예수님은 홀로 무너진 민족적 기대를 다시 쌓아야 했다.
마리아도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여자여”라는 공손치 않은 말씀은, 어머니조차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마 12:48-50). 육신의 혈연관계보다 하늘 뜻을 중심한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는 책임은 완수했지만, 그분을 메시아로 모시지 못했다. 특히 예수님이 신부를 찾아 성혼하도록 돕는 것이 그녀의 중요한 사명이었으나,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민중은 혼란스러웠다. 3년의 공생애로 4천 년의 기대를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이 잔, 즉 십자가가 본래 하늘의 뜻이었다면 왜 이렇게까지 피하고 싶어 하셨을까? 십자가는 본래의 뜻이 아니었다. 사명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불가피하게 가셔야 했던 고통의 길이었다.
십자가 후 예수님은 영적으로 부활하셨고, 성령과 함께 영적 참부모가 되셨다. 기독교 신도들을 영적으로 중생시키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였다. 그러나 절반의 승리였다. 영적 구원은 이루었으나, 실체적 구원은 미완으로 남았다.
재림의 약속: 신부를 찾아
예수님은 떠나시기 전에 약속하셨다.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 왜 다시 오셔야 할까? 미완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신부를 찾아 어린 양 혼인잔치를 올리기 위해서다.
요한계시록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예언한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 여기서 어린 양은 재림주님을, 아내는 독생녀를 의미한다. 실체 참부모가 이 땅에 현현하실 것을 예고한 말씀이다.
성서의 마지막 장에는 더욱 명확한 예언이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무형으로 역사하시던 성령이 실체 독생녀로 현현하실 것을 가르쳐준다. 생명수, 즉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 실체 하늘어머니로 오신다는 예언이다.
2천 년 준비의 여정
하늘부모님은 독생녀를 보내실 준비를 하셨다. 그것은 독생녀를 낳고 모실 수 있는 신령한 기반을 준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동정 순교자들, 중세의 여성 신비주의자들, 근대의 경건주의자들,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신령집단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기독교 2천 년 동안 신령한 신도들을 통해 영적 기준을 높여왔다.
영적 구원의 한계도 분명했다. 아무리 믿음이 깊은 신도라도 원죄는 사라지지 않고 자녀에게 전이된다. 완전히 중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실체 참부모를 통한 혈통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독생자와 독생녀가 참부모가 되고, 그 참부모를 통해 인류가 하늘부모님의 직계 자녀로 거듭날 때 비로소 창조이상이 완성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독생녀를 준비하는 섭리였다. 이스라엘 선민이 다하지 못한 사명을 기독교가 이어받았다. 하늘부모님은 가장 신령한 교회를, 가장 순수한 신부를 찾아 나오셨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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