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의 세월 넘어… 사할린 동포 후손들, 모국서 가족 상봉

2025-10-30

“쁘리비옡(Привет·안녕하세요).”

사할린 동포 2·3세들이 30일 인천국제공항 입국 게이트를 통과하며 손을 높이 흔들었다. 부모와 조부모를 만나러 온 이들의 얼굴엔 긴 여정의 피로보다 설렘이 묻어 있었다.

러시아 사할린 동포 2·3세 40여명은 이날 국내에 영주귀국해 살고 있는 1세대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번 방한은 재외동포청이 추진하는 ‘사할린 동포 2·3세 모국 방문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고령 등의 이유로 사할린을 직접 찾기 어려운 1세대 동포들을 위해 마련됐다. 2017년 시작된 이 사업은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한-러 직항편 중단으로 5년간 멈췄다가 지난해 재개됐다.

이들은 공항에서 곧장 경기 안산의 ‘고향마을’로 이동했다. 고향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사할린 동포 정착 마을이다. 50여 분을 달려 버스가 멈추자, 아들을 마중 나온 노모가 보였다. 어머니는 두 팔을 벌려 “아이고, 아이고”를 연신 외쳤다. 거동이 불편한 발걸음에는 안달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모자는 만나자마자 서로를 끌어안았고, 아들은 어머니의 볼에 얼굴을 부볐다. 세월이 새긴 주름 위로 눈물이 흘렀다.

사할린에는 일제강점기 강제이주되거나 현지에서 태어난 한인 약 2만6000명이 살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사할린 남부를 점령한 뒤, 석탄과 목재가 풍부한 섬은 ‘보물섬’이 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지자 젊은 조선인 남성들은 탄광과 벌목장으로 끌려갔다. “처음엔 돈을 준다더니, 나중엔 그냥 잡아갔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인이 일본의 패전을 불렀다’는 소문이 퍼져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듬해 미·소 협정에서 송환 대상을 ‘일본인’으로 한정하면서 한인들은 귀국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들은 국적 없이 사할린에 남겨졌고, 평생을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다. 1992년부터 고령 동포의 영주귀국이 허용됐지만 대상은 1세대에 한정돼 가족들은 또다시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김경순(88)씨도 사할린 1세대다. 그는 이날 5년 만에 막내아들을 품에 안았다. “어젯밤엔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어제 오는가, 오늘 오는가 하며 기다렸어요.” 김씨에게 심정을 묻자,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옆에 무뚝뚝한 아들이 서 있어 쑥스러운 듯했지만, 얼굴엔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아들 전은구씨(62)는 어머니 곁을 말없이 맴돌았다. 여행가방을 풀어 러시아에서 사온 초콜릿과 비타민을 찬장에 정리했다. “한국이 따뜻해서 좋아요. 어머니랑 여기서 살고 싶어요.”

김씨는 1998년 영주귀국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일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한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사할린으로 이주했고, 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 얼굴은 기억이 안 나요. 제 고향도 몰라요. 아버지 초상 치르던 모습만 어렴풋이 기억나요.”

그의 남편은 사할린에서 만난 13살 연상의 한국인이었다. 남편 역시 19살 때 부산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군인 생활을 했다. “남편은 평생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했어요. 아이들을 두고 와야 해서 많이 싸웠어요.” 김씨는 “아이들과 형제, 친척을 떼어놓고 오려니 마음이 찢어졌지만, 그립기도 하고 반가운 땅이 한국”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차린 점심상에는 뼈해장국과 김치, 김, 어묵볶음이 올랐다. 러시아에서 자란 전씨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한국 음식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모자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대화했다.

2000년 영주귀국한 김월선씨(90)도 이날 딸과 함께 사는 집에서 큰아들을 맞았다. 세 살 무렵 강제이주된 김씨는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다 일본 관리에게 맞아 얼굴이 부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러시아에 가고 싶기도 하다”고 했다. 사할린엔 아직 김씨의 손자들과 형제, 친척들이 살고있다. “명절 때마다 엄청 보고 싶죠. 오면 반갑고, 가면 섭섭하고.”

최정희씨(85)도 “남편이 ‘팬티 바람으로라도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늘 말했다”며 웃었다. 그는 2000년 강제징용된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들어왔다.

현재 사할린에는 1세대 동포 약 300명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3000여 명이 영주귀국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