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중심 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2025-12-11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중심사회’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정부가 출범할 때다. 당시 참여정부는 국정과제의 하나로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내세우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제2의 과학기술 입국’ 실현을 위해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을 혁신하고, 더 나아가 과학문화 확산을 통해 원칙과 신뢰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바 있다. 실제로 참여정부는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고 청와대 내에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직을 신설하는 등 정부 내에서 이공계의 입김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고, 국가연구개발 예산도 전문가가 중요 결정을 내리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참여정부의 ‘과학기술 입국’ 구상

이재명 정부도 ‘AI 3대 강국’ 목표

AI는 미래 문명과 사회 바꿀 기술

과학적 합리성 모든 분야 퍼져야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연구자들의 국가연구개발 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 이공계 전공자들의 공직 진출 문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과학기술은 어디까지나 경제개발의 도구로서 인정받았을 뿐이었고, ‘과학기술 중심사회’라는 말은 과대 포장된 구호로 끝났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출범한 이재명 정부도 ‘AI(인공지능) 3대 강국 도약’을 주요 국정 목표로 내세우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고 대통령실에 ‘AI 미래기획 수석비서관’직을 신설하였다. ‘과학기술’이 ‘AI’로 바뀌었을 뿐 정책 방향은 참여 정부 때와 똑같다.

그런데 이번에도 AI는 국가 경제개발을 위한 도구일 뿐일까. 아직도 많은 정치인과 정부 고위 관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AI는 과거의 기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태까지의 기술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능력을 보강하는 것이었지만, AI는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두뇌를 보완하거나 대치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챗GPT가 대중에게 선보인 지 3년밖에 안 지났지만, 이미 사회의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있다. 교육 현장은 챗GPT 허용 문제로 갈팡질팡하고 있고, 변호사나 회계사, 빅테크 기업 등의 고용 시장도 초급 전문인력을 대치하는 AI 때문에 바뀌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주듯이 전쟁의 양태도 과거와 달라졌으며, 미·중 갈등에서 보듯이 이제 국가 간의 경쟁은 기술패권 경쟁이다. 심지어 인간 창의력의 마지막 보루라고 볼 수 있는 예술 분야에서도 AI는 이미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 AI와 과학기술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중심 요인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했던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재소환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과학기술 중심사회’란 과학기술자나 연구개발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은 아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과학의 합리성과 실용적인 문제 해결력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뜻이다.

과학은 일체의 도그마(독단적 신념)나 편견을 배격하고 합리성과 문제 해결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천체의 움직임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하여 당시 절대 권력이었던 교회의 미움을 샀다. 아인슈타인은 빛과 빠른 물체의 운동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흘러간다”는 아무도 의심 않던 상식을 깼다.

이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종교적 진리나 만인의 상식도 무시하는 것이 과학의 정신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실용보다 독단적 신념에 사로잡혀 국가의 정책을 그르치는 일이 많다. 이미 많은 환경학자들이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는 원전(原電)을 철 지난 신념으로 적대시하며 AI 사회 건설에 필수적인 전력수급 계획을 막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주 52시간 근무’라는 인위적인 잣대 때문에 특정 직군에서 필요할 때 자발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것을 막는 것도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중국의 빠른 기술개발과 인프라 구축 속도에 경악하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의 질주에는 서구의 시간적 경험을 중국의 공간적 시행착오로 대치하는 전략도 주효하였지만, 관료들의 실용적이고 일관된 장기 정책 또한 큰 기여를 하였다. 중국 고위 관료들의 대부분이 대학에서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운 이공계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최근 큰 화제를 불러온 책(댄 왕 『브레이크 넥』, 2025)은 ‘변호사의 미국, 엔지니어의 중국’이라는 시각으로 미·중 경쟁을 분석하고 있다. 과연 한국은 율사(律士)들의 지배와 철 지난 이념을 극복하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과학기술 중심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변하고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중국에 뒤처지는 것은 물론 세계 무대에서 도태가 확실시된다는 점이 큰 인센티브가 될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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