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저지른 한확에 세종 “벌 줄 수 있는 자 아니다”

2025-02-06

누이·딸 혼사로 명문거족 일군 한확

“이 사람은 내가 벌 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세종이 절제사(節制使) 한확(韓確)의 범죄 사실을 외면하며 한 말이다. 고위 공직자 한확은 고미(古未)라는 여자를 범간(犯奸, 성범죄)한 사실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파면으로 무마하려는 왕과 국법대로 죄를 묻겠다는 사헌부의 대치는 ‘나 좀 봐달라’는 왕의 솔직한 고백으로 무장 해제되었다.(세종 7년 9월 28일) 죄에서는 벗어났지만 한확의 이 사건은 15세기의 삼한갑족(三韓甲族) 청주한씨 가문의 흑역사임이 분명하다.

누나와 여동생은 명황실 후궁

막내딸 세조 며느리로 시집 보내

명황제 신하 삼아 무시로 부르자

조선은 고위직 중용 외교 활용

친족 한명회도 화려한 혼맥

궁지기에서 왕의 장인으로

국왕도 눈치 본 존재감

국왕도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한확의 이러한 존재감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가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태종 17년(1417) 진헌녀(進獻女)에 뽑혀 명나라로 떠나는 누나 한씨를 호송하면서다. ‘고상한 아름다움’으로 명태종 영락제의 사랑과 존중을 받은 한씨는 곧바로 여비(麗妃)에 봉해졌다. 영락제는 ‘처남’ 한확에게 광록소경(光祿少卿)이라는 벼슬을 안긴다. 황제는 한확이 덕행과 재능을 갖추었다고 보았다. 종7품 무관직 부사정(副司正)이었던 한확은 5개월 만에 귀국하는데, 명 황제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금은보화와 말 6필, 각양각색의 비단을 가득 싣고서.

이후 황제는 한확을 무시로 불러들였다. 조선 정부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양국의 정치 외교 문제를 조율하는 등의 일에 한확을 앞세웠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수시로 한확을 찾았고 ‘영접’하여 곁에 두며 여러 현안을 의논하면서 노비와 전답으로 보답했다. 명황제의 신하 한확의 위상은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의 아우 한전(韓磌)은 7품관의 녹에 해당하는 관직이 주어진다.

황제의 후궁이 된 지 7년, 영락제의 죽음을 맞은 여비 한씨는 다른 후궁 30여 명과 함께 순사(殉死)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한씨, 그녀가 청주한씨의 명문거족화에 초석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테면 한확과 조선 국왕과의 잦은 독대는 둘째 딸과 세종의 아들 계양군의 혼인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확은 친족 한명회와 손을 잡고 가문의 권력을 가일층 확대시키는데, 여섯째 딸이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가 된 소혜왕후이다.

다시 한확의 누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누나 한씨가 죽은 후 한확은 다시 여동생을 보내기로 한다. 이번에는 영락제의 손자인 명나라 5대 황제 선덕제의 후궁 자리다. 고(故) 한영정의 3남 2녀 중의 넷째인 한계란(韓桂蘭, 1410~1483)은 언니가 죽은 지 4년 만인 1428년 10월에 호송 관원을 따라 서울을 출발한다. 이 행차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형 한씨가 영락제 궁인(宮人)이 되었다가 순사 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인데, 지금 또 가는구나”라고 하며 한씨를 생송장(生送葬)이라 했다. 공녀로 가게 된 한씨는 곧 병을 얻어 드러누웠다. 누이의 병을 걱정한 오빠 한확이 약을 건네자 울부짖었다. “누이 하나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세종 9년 5월 1일) 칼로 이불을 찢고 마련해 둔 혼숫감을 뿔뿔이 흩어버리기까지 한 그녀였다.

명황실에 안착한 한계란은 74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덕성과 지식으로 황실 가족들의 존중을 받는 삶을 살았다. 공신(恭愼)으로 시호를 받은 그녀는 베이징 서쪽 향산에 묻혔다. 생전의 한계란은 조카 소혜왕후와 서신 교환을 통해 혈연적 유대를 확인하곤 했다. 조카는 고모에게 조선의 특산물을 챙겨 보내고, 고모는 조카에게 중국의 책과 금은보화 등을 실어 보낸다. 진헌품을 한씨에게 전달하고 돌아온 신하에게 성종은 “인정(人情)으로 가져간 물건을 적게 여기진 않던가?”라고 하며 반응을 살피기까지 한다. 그만큼 중국의 황제 권력과 거리상 가깝게 있던 한씨는 조선에서 정성을 다해야 하는 각별한 존재였다. 명 황실의 후궁으로 입성한 한확의 누이들과 조선 왕실의 안주인이 된 한확의 딸 소혜왕후는 결코 우연적인 별개의 사실이 아니었다.

누이들의 명황실 진출을 계기로 자기 권력을 확대해가던 한확은 세종의 조정에서 이미 6조 판서와 각 도의 관찰사를 두루 거치며 고급 관료로 자리를 굳혔다. 문종과 단종으로 국왕이 교체되는 과정에서는 원접사와 사은사로 활약하는 등 국익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게다가 문종 즉위년(1450)에는 막내딸이 수양대군의 장남 이장(李暲)과 혼인함으로써 세조 시대를 연 실질적인 주역이 되었다.

세조 2년, 좌의정 한확은 사위 이장의 세자 책봉을 주청(奏請)하는 표문을 들고 북경으로 출발한다. “신(세조)의 적장자 이장은 현재 나이 19세로 나라 사람들이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나, 신이 감히 천단할 수 없기에 삼가 주문(奏聞)을 갖추었습니다.”(세조 2년 4월 27일) 안타깝게도 한확은 사은사로 떠난 지 4개월 반,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가사(家事)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었다고 한다. “부음이 들리매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예관(禮官)을 보내어 압록강 위에서 널(板)을 맞고, 도승지 한명회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호송하게 하였다.”(세조 2년 9월 11일)

청주한씨 가세 기틀 잡고 확장

15세기 조선에서 청주한씨가 갑족으로 불리며 가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한확이 기틀을 마련하고 한명회가 유지 확장을 주도한 공이라 할 수 있다. 한확과 한명회는 각각 고려 후기의 문신 한악(韓渥)의 4·5세손이다. 즉 둘은 9촌 숙질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확과 한명회가 권력을 만들어가는 방식은 몇 가지 점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누이 또는 딸을 통해 권력을 얻고 가문을 번창시키는 것이 그 하나다. 둘은 또 세조와의 유대가 돈독하여 세조의 묘정에 배향된 3인 중의 2인이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정승이 된 인물들의 명단에 올랐고, 임금이 직접 조문한 상신들의 명단에 올랐다.(『임하필기(林下筆記)·춘명일사(春明逸史)』)

역사에 화려한 족적을 남긴 한명회지만 그 시작은 미미했다. 조부 한상질은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받아온 장본인이고 종조부들 또한 개국공신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고아가 되다시피 하여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글을 읽고 학업은 쌓았지만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는데, 38살이 되어서야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개성에 있는 경덕궁의 궁지기 자리를 얻는다. 이때 수양대군을 만나면서 그의 모사(謨士)로 활약하게 된다.

한명회는 1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딸들의 혼맥이 화려하다. 삼녀와 사녀가 각각 예종과 성종의 왕비가 되었다. 혼인을 통한 권력 확장이라는 한명회의 기획은 한씨 가문의 누이이자 한확의 딸 인수대비(소혜왕후)의 정치적 이해와도 맞아떨어졌다. 소혜왕후의 아들과 한명회의 딸이 혼인함으로써 성종이 되고 공혜왕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왕의 국구(國舅, 장인)로 권력을 누리고자 한 한명회의 꿈은 왕비가 된 두 딸의 이른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한확 부인 신도비 석재 명황제가 하사

15세기 후기로 가면 한씨 가문의 실질적인 힘은 소혜왕후로부터 나온다. 당상관이 된 두 남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 조카들의 입신출세에 배후가 되었다. 또한 한씨는 친정어머니 홍씨 부인의 신도비명을 세우고자 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께서는 도의와 규방의 예절로 본받을만한 일이 많았는데, 비석은 우리 아버지 한 분만 있어서 되겠소?” 여자의 신도비명은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신도비의 석재는 명황제가 하사했고, 운반은 코끼리가 했다고 한다. 조선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코끼리가 죽자 부인의 묘 앞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도 한다.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 홍씨의 신도비는 양주시 은현면의 청주한씨 묘역을 지키고 있다.

가문의 형성과 확장에 유독 딸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조선전기 청주한씨의 사례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라고 한 옛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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