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과 기대

2024-09-25

추석 연휴에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다녀왔다. 머무는 지역에서 멀고 일이 많아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반갑고 애틋했다.

모처럼 가족끼리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두 분이 가보지 못했지만 분명 좋아할 만한 곳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흥미로운 과학 전시를 관람했는데 아빠도 직접 보면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될 거라고. 윌밍턴 바다에는 하얗고 동그란 조개껍질들이 많은데 반질반질한 표면을 손끝으로 문지르면 나까지 덩달아 간지러워진다고, 엄마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한참을 떠들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많은 곳에 겪어보지 못한 행복들이 마구마구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집에 와서도 일에 치여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보낸 주제에 기약 없이 번지르르한 약속을 늘어놓기도 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밝은 순간들만 오려 와서 잔뜩 안겨주고 싶은 마음에, 불투명한 미래가 때론 먼지를 뒤집어쓰고 캄캄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체했을 뿐이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만큼이나 우리가 함께 맞이할 즐거움이 무수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니까. 그런 기대가 우리를 지치지 않고 살아가게 하니까.

강우근의 시 ‘환한 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에는 칙칙한 표정으로 “가족 모임에 불편하게 앉아” 있곤 하는 ‘나’와, 그런 ‘나’를 겁이 많아 바깥에 나가지 않는 만화 캐릭터 “부기 아저씨”와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어린 조카가 등장한다. 조카는 “하얀 집에 살고 싶”다며 자신이 스케치북에 그린 집을 보여준다. ‘나’는 그런 허술한 집에는 “여름에는 태풍이 오고” “겨울에는 폭설”이 칠 것이라고 걱정한다. ‘나’는 “하얀 집”이 금세 “검어질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삼촌은 어떤 집에 살고 싶냐는 조카의 물음에 “검은 집”을 떠올리는 ‘나’는 애써 말을 삼키고 “환한 집”이라고 대답한다.

조카와 함께 먹던 “생크림 케이크”에는 “검은 파리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더럽혀지고야 말 조카의 하얀 집처럼, 좌절을 배워나갈 어린이들의 흔한 미래처럼, 새하얀 케이크 위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조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황급히 케이크를 치우고 새로운 “생크림 케이크”를 테이블에 꺼내어 둔다. 불의와 배반, 부조리와 모욕에 지치어 얼룩지고 어두워질 바에야 차라리 검은 집을 택하는 심정을, 검게 물들지 않게 지켜내려다 안쪽에서 잠기고 만 순백의 마음을, 조카만큼은 모르길 바란다. “삼촌이 배가 고파서”라며 궁색한 핑계를 대는 ‘나’에게 조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결코 훼손되지 않을 하얀 집, 하얀 케이크가 아님을 알려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삼촌에게 추천해줄 케이크의 맛이 아주 많아.” 자주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나’에게,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나’에게, 기어코 알아가야 할 달콤함이 많이 남아 있다고 가르쳐주는 것이다.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자체로 반짝이는 소망을 건네받는 ‘나’는 그제야 조카와 자신을 “우리”라고 불러본다.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환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 우리는 생크림 케이크를 아무런 근심 없이 나눠 먹는다.”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누군가의 내밀한 그늘까지 말끔하게 지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홀로 감내해야 할 시련을 대신 물리쳐줄 수도 없을 것이다. 정다운 약속들이 때로는 다정한 다짐보다 미련한 오기에 가까워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낼 날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예견된 기쁨에 대해 오래도록 대화하는 일은 서로의 마음을 포실하게 만든다. 당신을 환히 웃게 할 장소와 시간이, 만남과 얽힘이 도사리고 있다고, 그 미지의 빛을 믿어보라고 무한히 속삭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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