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적호소년회’로 이름을 바꾼 이유

2025-04-25

동면소년회는 1926년 5월 9일 보성학교에서 총회를 열고 명칭을 적호소년회로 바꿔 새롭게 창립한다. 창립총회를 보도한 <시대일보>를 보면 ‘동면소년회의 자못 역사가 길고 소년운동에 많은 공헌이 있었는데 더욱 운동을 철저히 하기 위하야’ 명칭을 적호소년회로 바꿨다 한다. 동면이라는 지역 이름에서 ‘적호(赤虎)’ 붉은 호랑이라고 바꿔 소년운동을 철저히 한다는 것은 활동 이념을 보다 선명히 했다고 봐야 한다.

먼저 적색을 표방한 것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나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적색은 1917년 러시아혁명 시기 혁명군을 상징하는 색이었으며 러시아 내전 당시 반혁명군은 백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했다. 일제 당국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검거할 때 ‘적색’을 앞에 붙여 다른 사건과 구분하기도 했다.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자 한민족의 용맹한 기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동면은 조선시대 국영 목장을 둘러싼 염포산과 마골산을 타고 목장까지 내려오는 호랑이가 많았다. 여러 호랑이 전설과 함께 호랑이 사냥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남목 마골산에 있는 착호비다. 이 비석은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른 전후장의 묘비로 1746년(영조 22년)에 호랑이 다섯 마리를 사냥하고 1757년(영조 33년)에도 호랑이를 잡아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울산목장은 말을 노리고 침범하는 호랑이 사냥을 위한 인원을 상시 배치했는데 1871년 발간된 <영남읍지> 속 ‘울산목장목지’를 보면 산행장, 포수, 창군 등 총 55명에 이른다.

울산 동면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안성에서도 적호소년회가 활동을 펼쳤는데 해당 지역 역시 다양한 호랑이 전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다른 지역 적호소년회 역시 동면과 마찬가지로 소년운동에 충실한 단체였다.

적호소년회가 창립한 시기의 동면은 일본인의 위세가 방어진을 중심으로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1924년 8월 서부리(남목)에서 방어리로 면사무소 소재지 이전이 결정돼 1925년 12월 면사무소를 옮기게 된다. 이에 반발한 목소리를 실은 신문 기사를 보면 “일본인 437호를 위하여 조선인 1502호의 불편을 조금도 생각 없이” 정했다고 나온다.

면사무소 이전 시기 방어진은 인구가 더 늘어난다. 이주어촌이 들어서 침탈이 가속되는 동안 일본인이 더 많다가 일자리를 찾아 유입된 조선인들이 늘어나면서 1926년 기준 조선인 3044명(628호)에 일본인은 1715명(430호)으로 역전이 됐다. 하지만 조선인의 삶은 방어진의 변두리로 밀려나 살면서 빈곤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1925년 6월 <동아일보>에 실린 ‘방어진 유지제군에게’라는 기고 글을 보면 “방어진에 일인 상점과 요리점이 즐비한데 무산대중은 기근에 시달린다”는 내용이 있다.

정리해보면 적호소년회는 이전 동면소년회보다 사상 면에서 사회주의 계열로 움직였고, 주민들의 기억에 박힌 용맹한 호랑이의 기운으로 일본인의 횡포를 막고 조선인의 고통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적호소년회의 강령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一 우리는 건강한 신심과 혁고한 단결로써 인격을 완성함

一 우리는 정의를 위하야 상부상조의 정신을 양성함

一 우리는 대중을 본위한 신사회의 건설을 훈련함

적호소년회는 창립총회에서 강령과 규약을 새롭게 개정했다. 개정된 강령 1, 2항은 소년운동이 이어온 기본 가치를 보여주지만 3항은 ‘무산자’인 영세농(소작농)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사회주의 계열의 이념과 상통한다.

동면구락부를 재편한 오월청년동맹이 적호소년회보다 한발 먼저 1926년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결성하고 이름에 포함시킨 것도 같은 의미다. 이때는 울산의 독립운동 진영 다수가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울산은 소작인회(1923. 11), 울산노농동우회(1923. 12), 언양무산자동맹(1924. 3), 방어진노동자친목회(1924. 8), 병영노농동지회(1925. 8) 등이 차례로 결성되고 사상단체 성우회(1925. 4)와 자오회(1926. 4)가 있었다.

이처럼 울산지역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 사회주의 계열(북풍회, 서울회)이 주도했다. 그중 북풍회는 동면·언양·병영의 청년운동을 이끌며 울산군청년연맹을 결성한다. 서울회는 울산청년회(울산읍)가 중심이 된 울산청년연맹과 연결됐다. 적호소년회 역시 북풍회의 영향이 컸던 오월청년동맹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한다.

적호소년회 임원이 된 김경출과 박두복

적호소년회 임원도 새롭게 선출했는데 김경출이 회장을 맡게 된다. 창립 2개월 전에 보성학교를 3회로 졸업한 김경출이 적호소년회를 이끌게 된 것이다. 임원들의 나이를 보면 모두 만 17세에서 12세였는데 김경출은 당시 16세였다.

여기에서 동면 소년운동이 지닌 한 가지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전국 소년단체 중 대표자를 20대 이상 청년단체나 사회단체에서 맡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동면은 연령을 확실히 구분했기 때문이다. 청년단체 회원이 소년단체 회원을 겸하면서 지도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운동경력이 많은 선배 활동가가 사회운동의 한 부문인 소년운동을 지도한다는 조직 운용이었다.

이렇게 청년이 소년운동을 대표하거나 소년단체와 청년단체를 모두 가입한 ‘이중’ 활동은 이후 논란거리가 된다. 1928년 3월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연맹)’으로 전환한 정기대회에서 토론을 진행해 회원 12~17세, 대표자 18~25세로 연령 제한을 둔다.

적호소년회가 창립 초기부터 18세 이하로 연령 기준을 맞춰놓은 것은 오월청년동맹과 연계는 하지만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적호소년회 다른 임원들의 나이와 이력을 살펴보면 서무부를 맡은 박학조는 김경출과 보성학교 3회 졸업 동기였다. 교양부 천덕고는 졸업 연도도 같고 나이도 동갑이었다. 또 다른 교양부원 장두석은 척후부의 정재하와 함께 1909년생 17세로 김경출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운동부를 맡은 장석준은 회장 김경출과 졸업 동기는 맞지만 나이가 14세(1912년 출생)라 상대적으로 어렸다. 또 다른 운동부 박두복은 척후부의 서영규와 함께 보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서영규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1928년 졸업생으로 제일 밑 학년이었다.

학교를 기준으로 나누면 보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이 많고, 동면보통학교 졸업은 김동출과 박두만 2명이었다. 두 사람도 사는 곳이 방어리와 일산리로 보성학교가 취학 대상으로 포괄한 지역이니 평소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호소년회의 초기 활동

적호소년회의 중심 활동은 세 개의 강령에 맞춰 충실하게 이루어졌다. 강령 1항의 ‘건강한 심신’과 ‘단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운동경기는 축구였다. 동면 축구대회는 동면구락부가 오월청년동맹으로 바뀐 이후에도 매년 8월에 지속됐는데 적호소년회도 후원으로 참가했다. 1930년에 이르면 적호소년회가 울산소년동맹 동면지부로 전환하면서 소년축구대회를 따로 분리해 개최하는 것을 논의한다. 박두복은 적호소년회 초대 운동부를 맡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교양부를 중심으로 가장 먼저 펼친 사업은 대중 강연회와 소인극 공연이었다. 창립 1개월 뒤에 열린 6월 27일 월례회의에서 회원 확대와 함께 주 단위 강좌와 순회연극 개최를 논의했다. 1926년 8월 19일 일산정에서 ‘노동자의 죽엄’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상연한다. 극의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방어진에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조선인 노동자의 삶을 다룬 것으로 짐작이 된다. 1920년대 중후반 일제의 수탈과 노동자 착취 등 계급사회의 모순으로 프롤레타리아 연극이 활발했기에 전문성과 별개로 동일한 취지로 추정된다.

연극 순회공연과 함께 열린 강연회는 보성학교 교장 성세빈의 ‘인생의 분기점에 있는 소년을 유의하라’로 문을 열었다. 보성학교 교사였던 장인두와 성세륭이 ‘자립성을 촉진한다’와 ‘역사의 진화법과 우리의 운동’을 주제로 연이어 강연에 나섰다.

강연회 연사들이 모두 보성학교 교사인 것과 동시에 오월청년동맹의 임원들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적호소년회가 독립적인 활동을 펼친 것뿐 아니라 윗세대 청년단체인 오월청년동맹과 긴밀하게 연계되고 지원과 지도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로 적호소년회 임원들은 보성학교 노동야학 운영에도 참여해 지역 운동의 세대교체 과정을 밝았다. 1927년 3월 13일 열린 월례회에서 기관지 발간과 소년웅변대회 개최와 함께 논의 한 것이 노동야학 교원 참여였는데 회장 김경출을 비롯해 박학조와 천덕고로 결정했다.

적호소년회 활동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이 확산하는 과정에 소년운동을 무산자 아동을 중심에 둔 계급운동으로 성장시키는 흐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소년운동의 중점을 아동보호와 교양에 두는 것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신간회 창립 이전 사회운동 전반이 분열된 것처럼 소년운동 역시 진영 간의 차이에 따라 균열했다. 서울지역은 이미 소년운동연합회와 오월회(경성소년연맹)가 1925년과 26년 어린이날 행사를 분립해 진행하고 있었다. 경성소년연맹을 필두로 1927년이 되면 사회주의 계열 운동과 맞닿는 소년운동의 방향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분열이 심화된다.

울산은 일부 소년단체 사이에 직접적인 마찰이나 노선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초기부터 지역별로 따로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다. 주로 울산읍, 언양, 병영, 동면으로 나뉘어 4개의 행사가 독자적으로 준비해온 것을 펼쳐냈다고 봐야 한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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