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가 현실로 나타나며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린란드에 이어 중동의 가자 지구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트럼프의 노골적인 팽창주의에 해당 지역은 물론 세계가 술렁인다. 신고립주의로 불리는 트럼프의 정책은 한반도의 경제와 안보에도 폭풍을 예고한다. 무엇보다 우리 입장에선 동맹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안보 무임승차 불허’가 가장 큰 관심거리다.
해양 안보 미 질서에 전적 의존
국내 원유 비축분 한 달치 불과
미 패권과 중국몽 충돌 불가피
중 남중국해 장악 남의 일 아냐
지난달 25일 JD 밴스 부통령의 “귀중한 미군을 아껴야 하고, 모든 곳에 보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마이크 왈츠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강성 인사는 주한미군 감축이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 등 한국을 향한 구체적인 압박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에는 부담스런 부분이다. 또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비한 ‘확장 억제 전략’의 실효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어 우려된다.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철저한 대비가 시급하다.
미와 조선 협력 레버리지로 활용해야
한국은 한반도 밖의 해양 안보를 미국 주도의 국제 해양 질서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2023년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국내 총생산(GDP)의 88.9%를 차지한다.(한국은행 자료) 석유와 가스에너지는 전량, 식량의 80%를 수입에 의존한다. 수출입 물동량의 99.7%는 해상 교통로를 이용한다. 한마디로 해상 교통로가 생명선인 셈이다. 이 길이 막히면 하루 6520억원, 한 달이면 19조5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23년 말 한국은 해외 비축분을 포함해 1억4600만 배럴의 석유를 확보하고 있다. 유사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국내 비축량은 9700만 배럴 정도다. 하루 소비량은 286만 배럴, 산술적으로 32일을 버틸 수 있는 양이다. 한 달 이상 해상 교통로가 차단되면 악몽의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국가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해상 수송로를 우리 스스로 보호할 전략이나 대책이 부실하다는 점은 심각하다.
미국은 그동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특히 중국에 비해 열세인 해군력 극복을 위한 미국의 움직임은 자국 내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230배에 달하는 선박 건조 능력으로 함정을 찍어내듯 건조한 결과다. 2024년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295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는데, 380척인 중국보다 85척이나 적다. 2030년이 되면 격차는 140여 척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은 이미 10년 전부터 다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2014년 아시아 회귀전략(Pivot Asia Strategy)으로 인도·태평양사령부를, 2020년엔 쿼드(Quad, 미국·인도·일본·호주 안보협의체), 2021년에는 오커스(AUKUS, 호주·영국·미국 안보동맹)를 창설한 게 대표적이다. 2023년에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한·미·일 안보 협력시스템도 갖췄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하며 미국의 해군력 보강을 위해 한국 조선소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2054년까지 1조750억 달러(약 1554조원)를 투자해 390척의 함정을 건조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와 한국 정부의 조선 협력을 한·미 동맹 강화, 한국의 해양 수송로 확보에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다.
수출입 물량 40% 남중국해 통과
미국은 전 세계 해양의 통제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패권국이 됐다. 아마도 이런 기조는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고, 이에 부합하는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 할 것이다. 반면 중국은 ‘중국몽’ 실현을 위해 미국 주도의 해양 통제권에 도전 중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7개나 건설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중국은 2020년 이미 남중국해의 통제권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남중국해는 우리 수출입 물동량의 40%가량이 통과하는 곳이다. 한국의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장소인 셈이다. 중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한국의 움직임에 따라 서해에서 군사적 움직임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해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맡았던 시절 서해에서 중국의 해상 무력시위를 경험했다. 이미 중국의 해양 패권 쟁탈 시도가, 특히 대만이나 남중국해 문제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닌 한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중국의 해양 패권 확대 시도를 저지하려 하지만 중국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남중국해 인근의 공중과 해상에서 양국의 군사력이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향후 남중국해의 통제권 확보를 위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 수위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북한이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핵 추진 잠수함을 보유한다면 우리에겐 최악이다. 북한은 핵잠수함을 이용해 미국 본토 타격 위협은 물론이고, 원해에서 한국의 해상 수송로를 교란하려 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한국의 안보 전략에 새판짜기가 불가피해졌다. 이 과정에서 해양 수송로 확보를 위한 전략 수립이 후순위가 돼선 안 된다. 과거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전략에서 상황에 따라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각자도생도 고려해야 한다. 외교적 노력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군사 능력 확충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은밀한 원거리 작전을 위한 핵추진 잠수함 확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로선 한국의 핵무기 보유가 쉽지는 않겠지만 북한의 핵위협 수위에 따라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도록 한·미 협력을 강화하고, ‘잠재적’인 핵 능력 확보를 위한 노력도 검토해야 한다. 경제는 얼마나 잘 사느냐의 문제지만 안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최윤희 전 합참의장·한국해양연맹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