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모임

2024-12-17

비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이 하나 있다. 이 모임은 비정기적이지만 목적이 뚜렷한 모임이다. 경조사가 있거나 연말이나 연초여서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상대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못 배길 때’ 소집되는 모임이다.

가령 새로 알게 된 장칼국수 맛집이 있는데 그걸 얘기해주고 싶어서 못 배길 때, 정주행하기 시작한 드라마가 있는데 그걸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서 못 배길 때, 그 못 배기는 사람이 모임을 소집하면 된다. 다만 규칙이 하나 있는데 모임을 소집한 사람의 얘기를 들으러 가는 사람은 자신 또한 얘기 하나를 준비해 가야 한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들으러만 가서는 안 된다.

얘기하고 싶고 얘기거리 있을 때

그때그때 만나 일상 나누는 모임

상대 얘기에 대한 기대감도 묘미

취향 솔직히 담아야 호응 끌어내

쓰고 보니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결국 뭔가를 얘기하고 싶고 얘기할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그때그때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두 명이 모이게 될 때도 있고 넷이 모이게 될 때도 있다. 삼 개월 넘게 전혀 안 만나기도 하고 한 달에 두서너 번을 만나기도 한다.

지난달에 나는 생양배추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법을 알아냈다. 그걸 알아내자 사람들한테 얘기해주고 싶어 못 배길 정도가 되었다. 그걸 터득하기까지 긴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혼자만 알고 있기가 아까웠다.

내가 소집한 모임에는 두 명이 나왔다. 그들은 과연 어떤 얘깃거리를 가지고 내 모임 제안에 응했을까. 그 기대감 또한 이 모임의 묘미였다. 이 모임에 나와 뭐라도 얘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얘깃거리를 포착하고 구성해 멤버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자질이 필요했다. 그 얘기에 본인의 취향과 태도를 솔직히 담을수록 다음에 본인이 모임 소집을 했을 때 더 많은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기도 했다.

A는 얼마 전 마을버스를 탔다고 했다. 사람들이 별로 없을 시간이어서 그 마을버스에 승객은 A뿐이었다. 기사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성으로 마을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A와 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버스가 사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일 때였다. 기사가 돌연 손자로 보이는 아이와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 영상 안에선 며느리로 짐작되는 여자가 ‘아버님!’하고 밝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 옆에서 귀여운 손자 또한 할아버지한테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어 다시 운전을 시작하면서도 기사는 한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이어갔다. 버스에 승객은 A뿐이었다. 기사는 며느리와 손자를 대하는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의적으로 비칠 수 있는지 안다는 듯 목소리에 흐뭇함이 묻어났다. 누가 봐도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A는 그 시간 내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A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 대중교통과 버스운영팀에 그 맘씨 좋은 할아버지를 신고했다.

A가 준비해온 얘기는 B와 나에게 왠지 모를 만족감을 주었다. 그날 B가 준비해온 얘기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쪽의 얘기였는데 그 얘기 또한 A와 나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내 양배추 얘기는 어땠을까. 건강식에 관심이 많은 A와 B는 생양배추를 맛있게 먹는 법에 대한 팁을 얻기 위해 그 긴 마을버스 얘기를 준비해왔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내가 그간 여러 방법을 시도해본 과정 또한 알고 있었다. 양배추를 썰어 들기름에 버무려 먹어보기도 했고 참기름에 버무려 먹어보기도 했다. 소금만 쳐서 먹어보기도 했다.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레시피는 양배추 생절임 샐러드로 양배추를 채 썰어 소금에 절인 뒤 간장과 들기름, 식초와 올리고당을 넣고 샐러드 삼아, 반찬 삼아 먹었던 것이었다.

나는 A와 B에게 말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끝에 내가 도달한 결론은 양배추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소금조차 넣지 않고 그냥 먹는 것이라고. 그것이 가장 맛있다고. 가장 질리지 않고 오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치 득도한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을 나는 A와 B에게 최대한 전달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했던 것 같다. 양배추는 백순대 볶음에 넣어 먹는 게 제일 맛있지, 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어, 헤어질 때까지 내내 그런 말이 이어졌던 걸 보면 말이다.

최은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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