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 출범에 가장 민감한 풍향계, 대기업의 새해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시계(視界) 제로’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일보가 10대 그룹을 긴급 설문한 결과다. 재계는 “조속히 국정을 안정시켜 달라” “외교통상 분야에서 협상력을 발휘해달라”는 요구를 쏟아냈다.
중앙일보는 19일 삼성전자·SK이노베이션·현대차·LG에너지솔루션·포스코·롯데쇼핑·한화솔루션·HD현대중공업·GS칼텍스·신세계이마트(2024년 기준 농협 제외 대기업집단 자산 규모 순, 이하 그룹명 표기) 등 10대 그룹 핵심 계열사에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둔 신년 투자·채용·신사업 추진 계획과 올해 최대 리스크(위험), 정책 과제,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영향을 설문했다.
조사에 따르면 올해 투자 계획 관련 삼성·한화·GS·신세계 4곳은 “지난해와 비슷하게 투자한다”고 밝혔다. LG·롯데는 “줄인다”고 답했다. 성장하려면 투자를 늘려야 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10대 기업 중 6곳이 제자리걸음 내지는 뒷걸음질한다는 얘기다. 두 곳(SK·포스코)는 아예 “투자 계획을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예외적으로 현대차와 HD현대 2곳만 “투자를 늘릴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앞서 지난 9일 그룹 차원에서 올해 국내에 24조3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위기에 위축되지 말자는 방침을 정한 현대차는 친환경 차 등 미래 차 분야에 투자를 늘린다고 발표했다.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미국에 제철소 설립을 검토 중이다. HD현대는 트럼프 2기 출범에 맞춰 수혜 주로 꼽히는 조선 투자를 늘리는 기조다.
기업의 ‘새 피’인 채용도 비슷했다. “채용을 늘리겠다”고 답한 회사는 1곳도 없었다. 채용 규모를 밝히지 않은 삼성을 제외하면 7곳이 “지난해와 비슷하게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LG는 채용을 줄일 계획이다. 다만 삼성·현대차·LG·포스코·HD현대 5곳이 “신사업을 추진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불확실한 환경에서도 미래 먹거리 투자로 활로를 모색하는 취지다.
기업들이 올해 최대 경영 리스크로 꼽은 건 “고환율 및 물가상승 압력”(7곳·이하 복수응답)이었다. “글로벌 경기 둔화”(6곳)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6곳)가 뒤를 이었다. 트럼프 2기 출범이 가져올 최대 영향으로는 “대중 견제 강화 및 공급망 재편”(4곳)과 “에너지 및 환경 정책 변화”(4곳)를 많이 꼽았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해 투자와 채용을 확대하지 못하는 ‘시계 제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기업마다 각개전투하는 모양새”라고 분석했다.
정부에 바라는 바도 언급했다. 10대 기업은 가장 필요로 하는 정책 과제 1순위로 “연구개발(R&D) 및 신성장 동력 지원”(7곳)을 꼽았다. 반도체 R&D인력에 주 52시간 근무 예외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한 반도체 특별법 등이 대표적이다. 해당 법안은 야당이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에 반대해 상임위도 통과하지 못했다. 삼성·LG·한화는 “조속한 국정 안정”도 정책 과제로 꼽았다. 삼성·LG·포스코는 “정부의 외교통상 협상력 발휘”를 바람으로 꼽았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트럼프 2기에 기업 스스로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굴지 대기업조차 새해 경영 전략을 짜는 데 주저하는 만큼 중견·중소기업은 상황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결국 탄핵 정국을 최대한 빨리 극복하고 정부·기업이 ‘원 팀’으로 뛰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