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이준구 ‘정론직필(正論直筆)’

2026-01-01

1

D저축은행이 공중분해 된 지 열두 해가 지났다. 자산 10조를 초과한 거대 금융기관은 단 한 줄 ‘영업정지’ 자막과 함께 무너졌다. 금융시장은 요동쳤고 증권가는 순식간에 폭락의 파도를 맞았다. 이어 TV 화면에 또 다른 자막이 떴다. -강성열 검찰총장 구속-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머그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쏟아진 커피가 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굴러간 머그잔이 탁자다리에 부딪치며 맑은 금속음을 냈다. 그 소리는 기자들의 대화 속에 묻혀 들렸다.

강성열! 그는 나에게 정의와 오욕, 그리고 죄책감의 상징이었다. 나는 기자였고, 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인기가 치솟은 대한민국의 ‘최고 수사 책임자’였다.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현직 대통령마저 벼랑 끝으로 몰아낸 ‘포청천’ 별명과 그의 어록이 퍼지도록 했던 직업을 가진 나 역시 그 활자의 한 축에 속했다. -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검사는 진실을 밝힐 뿐이다. 그냥 수사하는 것이다. -

열두 해 전, 그가 수사팀장으로 수사한 D저축은행 계열사 대표는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목숨을 던졌다. 그 죽음 앞에서 나는 침묵했다. 수사 책임자가 총애하던 H검사와 대학 동문이라는 이유로 부조화적인 사회분위기에 편승해야만 했다. 그 침묵은 결국 대검 중수부의 전횡을 조장했고, 불의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검찰총장이 구속되는 장면을 바라보던 그 밤, 나는 거실 불을 끄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거실에서 바라본 모악산 송신탑 불빛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총장에 대한 재판 뉴스가 나올 때마다 오래된 고민이 깊어졌다. 전직 대통령이 수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던 날, 총장의 웃는 모습을 찍어 유명세를 탔던 나는 한번 잘못으로 어용 기자가 되었다. 아파트와 모악산 사이 허공에, 대검 중수부 11층 검사실에서 바라보던 풍경이 다가섰다. 창문을 등지고 놓인 책상 앞에 두 개의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스테인리스 창살 너머 신축하던 ‘사랑의 교회’ 거대한 타워 크레인이 무너질 듯 느껴졌다. 대법원 청사 녹색 옥상헬기장을 표시한 H자가 선명했다.

나는 그곳에서 의자에 앉았던 선배의 표현처럼 한 마리 새가 되어 모든 현실에서 벗어나 하늘높이 날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판기를 두드리던 검사실 예리한 시선, 경직된 피의자의 초라한 어깨. 그리고 그 암울한 공기 속에서 갑작스러운 자살 충동의 그림자들. 피안으로 도피한 피의자 선배의 억울함이 내 심장 깊은 곳에서 기억의 냄새로 되살아났다. 서늘하고 암울한 조사실 기운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2

D저축은행 행장은 오십 대 후반으로 외국어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영문학도가 은행에 입사, K뱅크 여신본부장 이력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미다스의 손’으로 통했다. 대한저축은행 대주주는 거액의 연봉과 성과급 제시로 그를 스카우트한 것은 명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가 내세운 프로젝트는 해외 진출이었다. 그를 처음 접한 것은 경제부 기자 동기가 쓴 인터뷰 기사였다. 기사를 통해 나와 동향에다 고등학교 선배임을 알았다. 인사차 대화도중 같은 아파트, 같은 통로 이웃임을 알고 나서 반가움은 배가 되었다.

2012년 2월, 방배동 B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선배를 마주친 것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후배, 이른 출근이네.” “네, 선배님.”짧은 인사를 나누던 순간, 선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대검 중수부라고요?”스피커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지하주차장 천정까지 울려 메아리쳤다. “예, D저축은행 행장입니다.” “오늘 두 시까지 대검 중수부 1111호실로 오십시오.” “지금 출근 중인데……,

전화를 받던 선배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대검 중수부라면 요즘 문제 되는 부정대출 수사 아닌가요?”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다섯 개 계열사가 공동 투자 건에 내가 관여했지.” “중수부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오늘 출석하지 않으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겠다고 겁주네. 이거…….

보이스피싱은 아니겠지?”

나는 검찰청 출입기자라 즉시 확인 가능했다. “선배님, 그 방 담당 검사가 대학입학 동기입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그 말에 선배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검찰청 대표번호를 통해 검사실과 연결되었다. “박 수사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이기잡니다.” “이 기자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검사님 출근하셨나요?” “출근 전입니다. 기자님, 저에게 말씀하시죠.” “부정대출 건으로 바쁘시죠?. D저축은행 행장을 호출하셨다는데, 피의잡니까?” “현재는 참고인이지만, 정치자금 제공 여부에 따라 피의자로 입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답을 스피커폰을 통해 들은 선배가 중얼거렸다. “참고인이 피의자로 바뀌는 건……, 순간이라던데.”

그 말이 들렸는지 계장이 반문했다.

“혹시 저축은행 그룹에서 야당 정치인에게 정치자금 흘러갔다는 소문 알고 계십니까?”

도리어 되돌아온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통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선배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정치자금 전달한 적 있으십니까?”그러나 선배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 감추려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3.

그런 선배를 나는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학창 시절, 큰 잘못이 아닌데도 생활지도부 선생님 호출에 두려웠던 때가 떠올랐다. “후배, 시간 좀 내서 법무법인 이데아에 같이 가줄 수 있겠나.”

경제부 동기가 쓴 인터뷰 기사로 인해 식사 대접을 받았고, 봉투까지 받은지라 취재 차원 명분으로 동행을 승낙했다. 대검 출석까지는 다섯 시간 여유가 있었다. 여의도 사무실에 취재일정을 보고한 뒤, 곧장 대검 기자실로 들어갔다. 주요 사건 보도 자료를 살펴보고 법률사무소가 즐비한 건물로 들어갔다.

약속 시간 법무법인 사무실에 도착하자, 부장판사 출신으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 변호사가 우리를 맞았다. 그는 회사신문 제호 아래 한 달 동안 광고를 부탁했던 인연이 있어 낯익은 얼굴이었다.

- 전관예우. - 법조계의 오래된 불문율로 사법고시동기 판사와 검사, 변호사 그들만의 암묵적 인간관계는 쇠사슬처럼 연결된 구조다. 선배가 찾은 변호사도 H 검사와 대학 같은 과 동기이자 연수원 동기였다. 평소 말수가 적고 신중하다는 소문과 달리 그는 사건 내용을 묻기도 전에 이미 모든 내막을 알고 있었다.

- 퇴직하기 전, 법원과 검찰청을 돌아다니며 얻은 정보겠지. -

변호사는 드물게 흥분한 목소리로 상담을 이어갔다. “행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은 참고인 신분이지만, 결국 피의자로 전환해 구속 수사 할 겁니다. 이번 수사는 VIP 직접 지시로 시작된 수사입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흥분된 목소리와 달리 선배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갔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선 재산 정리를 하셔야 합니다. 예금은 현금화하고 부동산은 타인 명의로 가등기해 두십시오. 착수금으로 한 장이면 제가 모두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변호사의 눈빛에는 개업 초기에 전관예우를 이용하여 한몫 챙기려는 욕심이 보였다. 사무실을 나오며 나는 선배에게 물었다. “짧은 시간에 일억 원 입금이 가능한가요?”

금융기관 대표라면 그 정도는 간단히 이체할 것이라 여겼지만 선배의 대답은 달랐다. “어렵네. 그런데 우리 계열사 대주주는 두 장으로 대검 중수부 출신 부장검사를 선임 했다더군……,”

힘없는 선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선배님, 이건 선임료 과다 문제가 아닙니다. 구속 여부가 달린 문젭니다. 금전적 피해와 명예 실추는 감수해야 하고요, 불구속이 된다 해도 성공보수를 추가로 요구할 겁니다.” “내 잘못이 없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선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갑자기 휘청거렸다. 얼른 부축했다. 긴 숨을 토하더니 고맙다 했다. 위로하려던 말이 오히려 무거운 경고가 된 것 같아 미안했다. “서초동은 진실보다 돈이 먼저 움직입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하지요. 업무상 배임죄라도 걸리면 책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서 여러 차례 대검찰청으로 출석했다. 참고인으로 서너 번 나가더니 피의자로 전환되어 영장 청구 기미가 보이자 내게 부탁했다. “이기자? 대검 수사정보·정책실에서 수사 방향 좀 확인해 주게.”

4

2012년 늦봄, ‘D저축은행 비자금 사건’이 모든 매스컴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서초동 법원과 검찰청 앞에는 후순위 채권자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사회부에서 잔뼈가 굵은 나조차 사건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보도본부장이 날 부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지시했다. “정치자금 수사 배후에 검찰 내부 조작 소문이 떠돌아, 이기자가 책임지고 파헤쳐봐.”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뒤바꾸었다.

본부장은 중정 고위직과 가까워 정보 입수가 한 박자 빠르고 정확했다. 나는 지시를 받는 즉시 수사 브리핑과 압수수색 현장마다 소형 녹음기를 숨기고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배를 향한 의리이자 진실을 확인하려는 기자로서의 최소한의 책무였다.

본부장 지시를 잘 따르면, 승진이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했다. D저축은행의 지분 구조, 성장 과정, 정치권· 학계· 언론· 재계와의 인맥을 파고들었다. 금융기관 임원들 대부분 순수하여 자료 수집은 순조로웠다. 선배가 활동비로 쓰라고 준 두둑한 현금을 검사와 수사관, 여직원까지 은밀히 전달했다. 그들은 선배와 내가 의형제라 할 만큼 가깝게 지내는 것을 알고 수사진행 과정을 사전에 미리 알려주었다. 선배는 이러한 편의제공을 기뻐했다.

수사관 조사는 정중했고 커피 대접도 받으며 편안한 심문에서 “이기자의 부탁을 받았다.”라는 말도 전해 들었다. 참고인 조사는 백 여 건에 이르는 고액 대출 과정에 대해서 사실대로 진술했다 라며 대검 특수부라 해도 금융 전문성은 부족하다는 촌평도 했다. 이어서 대검 중수부 조사가 금감원 감사보다도 수월하다고 했다. 전문성과 이해력 부족 때문에 시간만 허비했다고 투덜댔다.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브릿지론을 이해시키는데 곤혹스러웠다는 등 시시콜콜 알려왔다.

미국 네바다와 유타 사막에서 태양광 전력을 생산하는 프로젝트 투자설명에는 금융권이 미래의 먹거리 투자 상품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캄보디아 고액 대출건은 캄코 에어포트, 캄코 하이웨이· 캄코시티 등 인프라 수출 관련 대출상품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더 붙여서 캄보디아 왕실 보증을 받아 안정적 회수가 보장된 유태인 상술을 칭찬하며 수사관들에게 교육시킨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만, 대검 수사 결과를 VIP에게 매일 보고하는 사실은 기자단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선배는 모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부실 은행 수사 명목이었지만 이면에는 야당으로 흘러간 비자금 수사였다. 비자금 단서를 찾지 못하자 권력형 비리 쪽으로 수사를 틀었다. 당초 목적과 달리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정치 자금 수수를 발각한 검찰은 통치자 형까지 구속하였다. 급격한 수사 흐름에 나는 총장이 다니는 식당입구에서 검찰총장을 만났다. “총장님, 안녕하세요.” “어이, 이해광, 바다 빛 기자 맞지.”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매는 독수리처럼 예리했다. “바다 빛 기자는 사건 전모를 잘 파악하고 있어요? 정론직필을 기대해.”

총장의 예기치 못한 칭찬에 통치자 형 사건에 대하여 파악하라던 본부장의 지시를 잊고 말았다. 본부장의 사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완전히 깨달은 건 10년이 흐른 뒤였다.

“총장과 사주의 만남에 대한 기사는 오프 더 레코드였지만 편집국장과 총장의 사적 만남은 문제가 있다.”

보도 본부장 지시로 암암리에 편집국장과 총장 관계를 파고들던 소문을 들었던지 편집국장이 나를 불렀다.

“이기자, 내 뒤를 누가 탐문하라고 했나?”

나는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사주와 가까운 편집국장의 힘에 밀린 보도 본부장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가 퇴임사로 남긴 말은 한 줄이었다.

“정론직필로 불이익당한 기자가 될지 언 정, 아세곡필로 출세한 기레기는 되지 맙시다.”

5

저축은행 선배가 피의자로 조사받던 검사실 공기는 팽팽했다. 길고 하얀 형광등 아래 CCTV 녹화기의 붉은 불빛만 깜박거렸다. 보도본부장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편집국장에게 권한이 집중되었을 때 편집국장이 호출했다. “이기자 대검 중수부 검사들의 고생을 르포 기사로 내보내.”검찰총장과 언론사주 사전 교감이라는 감이 왔다. 편집국장 방을 나오는데 특수부 H 검사 전화가 걸려왔다. “이 기자, 내일 저축은행 내부 제보자를 소환했어. 들어와서 조사상황을 살펴보고 특집 기사 한번 내 주시게.” “그런 기회를 왜 주는 건데요?” “묻지 말고 일찍 와봐. 조찬 같이하고 직원들 출근 전에 사무실로 들어가게.”

편집국장과 검찰총장도 같은 지역 출신이었다. 두 사람 회동으로 중앙정보부장과 다른 지역출신 보도본부장 경질은 분명했다. 언론을 통한 검찰의 수사정보를 흘리려는 저의가 확실했다. 검찰청 지하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검사실로 들어갔다. 내부 제보자는 D 저축은행 감사 위선장이었다. Y대 법대 출신으로 정치권과 긴밀했고, 구속된 통치자의 형과 같은 지역 출신이기도 했다. 그의 진술은 리허설을 마친 배우 같았다. 질문과 답변은 막힘없이 이어졌고, 조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행장 책임 아래 리스크를 감수하는 구조다. 여신심사위원회는 형식적 통과 절차일 뿐이다. 그의 명확한 진술은 결국 ‘업무상 배임’이라는 칼날로 선배를 겨냥한 진술이었다. 감사의 뒷배에는 여당 중진 의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D저축은행 경영진은 야당 국회의원과 동향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기자실 대부분 공감하고 있었다. 내부 제보자가 나가자 H 검사는 곧장 총장에게 스피커폰으로 보고했다. “전임 중정부장 출신 국회의원 배후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금융 여신 자체는 일부 문제가 보이지만, 캄보디아 여신은 부실우려가 없습니다.” “수고했어. 하지만 문제가 없다면 만들어야지. 해외여신을 샅샅이 파헤쳐. 직원들을 닦달하면 단서가 나올 거야.”

나는 자리에서 돌아서며 조용히 물었다. “H 검사님, 의혹으로 수사하면 일반 투자자 피해가 예상되지 않을까요.”그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이 기자, 특종은 누가 먼저 입을 여느냐에 달린 거야.”

나는 된 침을 삼키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6

르포 기사를 쓰기 위해 검사실에서 사실관계를 하나씩 확인하려던 순간, 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깨달았다. 회의감은 폭발했고 결국 르포 작성 자체를 멈추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편집국장은 특집 르포 기사를 재촉했다.

참고인 조사에서 피의자로 변한 임원들을 대검 중수부에서는 계열사 직원들까지 연이어 소환했다. 달래고 협박하기를 반복하는 조사는 끝없이 이어졌다. 피의자와 참고인들의 얼굴은 점점 초췌해져 갔다. 11층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는 검사와 수사관의 호통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여신 담당자들 역시 잘못된 진술은 바로 피의자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도 유도신문에 호락호락 말려들지 않았다.

여신 심사위원회의 절차는 어디까지나 형식을 갖추는 요식행위였다. 실제 대출은 금감원 파견된 R. M과 금감원의 사전 승인, 그리고 감사와 행장의 결재를 통과해야만 기표가 실행되었다. 이런 구조에서 여신 담당자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것은 법리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브릿지론과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처음 접한 수사관들의 엉뚱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조사관들이 새로운 사실을 얻지 못할수록, 직원들을 불러 진술서를 작성하라 했다. 퇴근 무렵이면 수사관의 질문과 진술서와 함께 대출관련 원장과 검토서류가 책상에 수북했다. 직원들은 이미 조사 패턴을 파악한 듯 서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수수료는 이익계정으로 입금되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실에 대한 진술을 반복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은행도 살고 담당 직원들도 처벌을 면할 수 있다며 수사관들의 집요한 회유와 협박은 노골적이었다.

“야당 의원에게 정치자금 제공한 사실을 실토하면 은행은 살려주겠다. 여신 심사위원들은 도장을 찍었으니 배임죄와 상호저축은행법 위반, 특가법으로 구속할 수 있다.”

그러나 직원들은 끝내 한 목소리였다. “저희는 정치인을 만난 적 없습니다. 윗선이 만났는지는 모릅니다.”

이와 같은 진술 과정을 들은 선배는 점점 괴로워했다. 대검중수부의 집요한 협박이 너무하다는 하소연을 나는 수시로 들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괴로움이 결국 선배의 마지막 선택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선배의 유해를 한강에 뿌리고 삼우제가 끝난 지 닷새째 되던 날, 나는 H검사를 다시 찾아갔다.

“조사한 피의자 장례식장에 찾아가 조문은 했습니까?” 나는 알면서도 빈정거리듯 물었다.

“가고 싶어도, 피의자 상가에 나타나면 검사가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지. 기레기들의 사냥감이 되라고?” 그도 비아냥거리듯 대답했다.

면전에서 쓰레기라는 조롱에 혈압이 올라 목소리가 올라갔다.

“어찌 됐든 피조사자 자살은 H 검사 책임 아닌가? 중수부 조사 중 자살한 대기업 대표의 죽음은 강압 수사 때문이지.”

내가 흥분되어 반박하자 그는 한 박자 늦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분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자살이 아니야. 정치자금 복마전의 희생자일 뿐…….”

“아니지, 대검 중수부의 조사 방식에 분명한 문제가 있어.”

H검사가 비웃듯 되물었다. “증거 있습니까?”

나는 검사의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있었지. 다만, 당신들이 지워버렸을 뿐.”

대검 중수부의 수사방식에 대한 특종 르포기사를 밤을 꼬박 새워가며 다시 썼다.

7

- 내부제보자 없음, 혐의 사실무근이라 주장.’-

르포 특집은 결국 실리지 못했다. 편집국장 방침에 따른 검찰 반론 미확보라는 이유였다. 익명 처리된 전면에 실릴 기사가 축소 요약되어 한쪽 귀퉁이에 1단 기사로 나갔다. 금감위 파견 Y대 출신 내부 제보자를 스카우트해 온 선배 고통은 깊어졌다. 은행원들과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한 억울함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자주 드나들었던 식당이었다. 테이블마다 법조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데, 선배는 말없이 소주잔만 비웠다. 나는 술잔을 세며 속도를 조절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금감위와 정계의 프락친 줄 모르고 영입한 감사에 대한 자괴감이 그를 무너뜨린 것이다. 심신이 지친 선배가 술을 마시다 말고 속삭이듯 말했다.

“후배, 나 좀 살려 줘.”

소주가 다섯 병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시간은 밤 11시였다. 8층에서 먼저 내리려는 내게 선배가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가족, 잘 부탁하네, 내가 죽어야 가족이 살아남지.”

술 취한 선배의 말은 그냥 흘러들었지만 구속을 예감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 간 한밤중,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이 기자님, 혹시 남편과 같이 계시나요? 아파트 입구에 구급차가 와 있어서요.”

“진즉 집으로 올라가셨는데요.”벽시계를 보니 이미 시곗바늘은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뛰어 내려갔다. 아파트 화단에서 구급대원들이 회색 양복 차림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 뒤 나는 서초경찰서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선배는 투신자살로 기록되었다. 1면 기사 제목은

- D 저축은행장, 투신자살. - 내가 붙였던 부제

-검찰의 무리한 수사- 는 삭제되었다. 하지만 기사를 보지 않아도 누구의 지시인줄 짐작이 갔다. 나는 선배의 죽음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느꼈다.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선배의 비극을 막지 못한 죄책감이었다. 장례식장은 유별나게 조용했다. 인터뷰를 쓴 기자와, 고향 선후배, H 검사, 내부 고발 감사도 오지 않았다. 영정 속 선배는 검은 정장에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문 후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 선배 휴대전화 기록 확인-

하지만 검찰이 압수했다 되돌려준 휴대전화는 통화 기록은 모두 삭제되어 있었다. 한 달 후 나는 지방 대학교수로 특채되어 이사했다. 49재가 되던 날, 휴대전화 화면에 죽은 선배의 번호가 떴다. 전화기의 목소리는 풀 죽은 선배 아내였다.

“진실은 기록보다 오래가지 않아요.”

그 말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신문사는 기다렸다는 듯 사표를 수리했다. 상경한 송별식 자리에서 나는 후배들에게 말했다.

“언론에서 자존심 버리고 곡필을 잘해야 출세한다. 내부 제보자 거짓 정보에 놀아난 수사였어.”

후배들은 난감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 검사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텐 프로 술집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옆방에서 중수부 검사들이 보냈다는 20년 산 양주 한 병이 들어왔다. 스폰서가 내주는 술을 마시는 검사들의 이중적 태도에 나는 분노했다. 선배가 왜 소주를 연거푸 마셨는지, 그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양주를 꿀꺽꿀꺽 들이마시자, 후배기자가 달려들었다. 내 손에서 병을 빼앗아 갔으나 이미 반쯤 마신 뒤였다. 블랙아웃 된 채 다음 날 점심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텐 프로술집 룸에는 나 혼자였다.

8

2025년 봄, 13년 만에 검찰총장이 구속됐다. -혐의는 직권남용, 증거인멸, 뇌물수수. -그가 포토라인에 서서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TV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나는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 비에 젖었다 말라버린 커피 얼룩과 취재 현장의 밤공기와 피곤한 손의 떨림까지 스며든 낡은 수첩. 그 첫 장에 쓴 글씨는 선명했다.

- 내부제보자 위선장-그리고 그 아래엔 그가 마지막으로 보내온 짧은 문자 한 줄이 있었다.

- 기자님, 진실이란 결국 누구 편에 서느냐의 문제입니다. D, 저축은행 감사-

그 문자는 해묵은 상처처럼 내 휴대폰 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문자를 지우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증거 때문은 아니었다. 그 문자를 남겨둠으로써, 내가 무언가에 대해 최소한의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착각일까?

-아니, 간절한 바람 같았다. -

그날 TV에 나타난 H검사의 미소는, 마치 자신이 여전히 권력의 심장부에 남아 있다는 듯, 오만함이 보였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나의 과거가 녹슨 창문이 열리듯 순식간에 열렸다. 기자가 되었던 날의 흥분, 권력 앞에서 침묵했던 순간의 비겁, 그리고 위선장 뒷모습까지. 나는 그 모든 장면에 천천히 되씹어 보았다. 나는 제자이자 후배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료 하나 줄게. 이름은 쓰지 마라.” “교수님은 아직도 대기자 아우라가 보입니다.” “대기자는 무슨, 기자로 실체적인 진실을 밝히지 못한 미안함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제자에게 자료를 주는 것조차 두려웠다. 기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인간으로서 피해야 할 죄책감의 경계는 언제나 바다 모래 위에 그은 선처럼 변하고 흔들렸기 때문이다. USB를 건네는 순간, 그 안의 시간이 묵직한 금속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2012년 봄, 대검 11층 검사실 창가로 스며들던 햇살이 노트북 화면의 아이콘처럼 흔들리던 오후, 몰래 녹음한 파일을 재생하자, 오래 전의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낯설고, 떨리고, 하지만 분명 나였다.

“H 검사, 참고인으로 소환한 우리 선배에게 구속영장을 꼭 청구해야 했나?” “이 기자, 너는 그걸 물을 자격이 없잖아?”

-그때의 나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단지 나 자신이 아직 선을

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 질문하고 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 질문의 톤에는 이미 굴복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깨닫고 기사를 작성했어야 옳았다. - ‘살아 있는 권력 신문’이란 게 무엇인지. -

그것은 누가 누구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척하며 결국 같은 배에 타고 있음을 확인하는, 차갑고 건조한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녹음 파일 끝에는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 숨소리가 마치 지금의 나를 비웃는 듯 들렸다.

9

중앙지방법원 320호 법정. 형광등은 오래된 학교 교실처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청석의 공기는 대검찰청 11층보다 따뜻했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사람들의 온기가 아니라 심판의 자리에 선 자들이 내뿜는 엄숙한 긴장 때문이었다. 이번엔 기자가 아니라 증인이었다. 나무로 된 증언대 모서리를 잡은 손바닥에 나무가 속삭이는 미세한 감촉이 느껴졌다. 법대 위 재판장 부장판사는 엄숙한 표정이었다. 기록을 넘기다가 멈추고 최후진술에 앞서 인자한 표정으로 천천히 물었다.

“당시 녹음파일을 왜 제출하지 않았습니까?”

그 질문은 법률적 절차가 아닌, 인간의 양심을 향한 송곳 같은 질문이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보도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방청석 한편에서 카메라 셔터가 터졌다.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한때 내가 속했던 세계, 밤잠을 쪼개며 누군가의 삶을 절반쯤 잘라 특종으로 내걸던 바로 그 세계의 소리였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법정에서의 심문은 재판장이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내 과거가, 내가 모른 척했던 진실이, 오랫동안 숨겨둔 과거의 비겁함을 현재의 내가 나를 심문하고 있다는 것을…….

10

한 달 뒤, 판결 선고가 모두 끝났을 때 나는 법원 앞 오래된 벤치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봄비였다. 가벼운 듯 무겁고, 따뜻한 듯 차가운, 삶의 경계를 이어주는 비를 맞고 있던 나에게 검찰청출입 기자가 우산을 씌워주며 물었다.

“선배님, 기사 제목은 뭐로 할까요?”

나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정론직필’이라고 해.”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오래 묵힌 문장을 덧붙였다.

“심문은 판. 검사만 하는 게 아니라, 세월이 하는 거야.”

후배는 그 말을 이해한 듯, 혹은 이해하려 애쓰는 듯 잠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우산 안쪽에 머물러 있던 몸을 일부러 밖으로 꺼냈다. 빗방울이 머리에서부터 얼굴과 어깨를 적실 때, 마치 오래된 나의 껍질이 씻기는 듯, 묘한 기분이었다.

2호선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갔다. 열차가 한 바퀴를 돌아오는 동안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유리창에 흐르는 비처럼 순식간 사라진다.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오래전 잊었던, ‘도시에 흡수되지 않으려 애쓰는 시골 쥐의 마음’ 같은 것을 되찾고 싶었다.

- 정론직필을 위하여. -

지방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으로 흐르는 빗물은 마치 내가 지나온 모든 세월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11

며칠 뒤, 포털 하단에 작은 기사가 걸렸다. -12년 만에 밝혀진 내부제보자 거짓 투서의 진실-

기자는 내가 지방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K신문 기자였다. 그는 사전에 기사를 내보내기 전 메일을 보내어 사전검토를 의뢰했었다.

“교수님, 이 기사……, 써도 될까요?”

“그래, 써라. 다만 제보자는 익명 처리해라.”

그의 기사는 간결했다. D 저축은행장 선배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다. 증거는 조작되었고, 회유한 검사와 기획은 정치인과 결탁한 내부제보자였다. 수사 책임자와 내부 제보자는 동향출신 대학 선. 후배사이였다. 악의적 가짜뉴스 배후는 법조인과 경제계를 동원한 검찰 출신 국회의원이 주도한 조작이었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 익명의 증언에 따르면, 오래된 기록은 진실을 증언한다. - “기사 작성 : 대검찰청 출입기자 배흥수.”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진실은 늦어도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비록 뉴스가 아니더라도, 혹은 누군가의 양심을 통해서라도. 특종은 결국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의 이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방 안 불을 끄고 다시 모악산 송신탑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아파트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소리는 마치 선배가 내 손을 잡아주던 마지막 신호 같았다. 그리고 나는 중얼거렸다.

“흥수야, 이제 됐다. 기록이 진실이야.”

12

그날 저녁 뉴스 자막이 12년 전처럼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 전직 검찰총장 구속-

결정적 증거와 화면의 자료는 12년 동안 보관해 온 취재 수첩과 아파트 화단의 사체를 찍어둔 사진이었다. 구속된 총장의 비웃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기자는 의심해야지. 그게 네 일이야.”

나는 그 말끝에 ‘특종’ 기사를 썼지만, 끝내 활자화시키지 못했다. 억울한 죽음은 그로부터 시작되어 부장검사가 영웅으로 포장되어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세월은 강산을 바꿔놓았다. 법정에서 결정적 증언을 하도록 한 사람은 나 아닌 제자였다. TV 채널마다 재판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피고석에 앉은 옛 친구 H 검사는 검찰총장에서 피고인으로 추락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셔터의 울림은 과거의 현장과 같았다. 현장에서 취재 노트와 녹음기를 들고 뛰어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던 열정이 발산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기자가 쓰는 한 줄 기사가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애써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 팩트가 중요하지 않다. 공익을 위한 기사라면 용서 된다. -

그 경구가 국가 전체의 도덕적 최면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미발표했던 신문기사 한 묶음 원고였다. -취재수첩 그리고 대검 중수부 르포-

보도하지 못한 진짜 기사였다. 녹취록에는 피해자의 딸이 울먹이며 했던 말이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남을 속이지도 않았고요, 왜 유능한 경영자를 정치인과 연결시켜 죽음으로 몰아갔나요? 기자로써 정론직필 했나요.”

나는 그 목소리를 기사로 내보내지 못했다. 선배 핸드폰의 자료는 12년 만에 비밀 번호가 풀려 재생되었다. 대검 중수부 정치자금 수사는 공작이었다.

-편집국장의 지시가 떠올랐다. -

“감정 선을 빼. 독자들 헷갈린다.”

승진이냐, 정론직필이냐 사이에서 흔들렸던 시절. 그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진실을 취재하는 기자가 아니라, 부지불식간 권력에 협조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봄비는 계속 내렸다. 젖은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었다. 십이 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책상에서 꺼낸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그 안에서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 기자는 기억의 관리자야. -

수습기자 시절 선배가 들려준 말의 무게를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과거의 수첩을 펼쳐보면서, 제자들에게 강의할 첫 문장을 다시 썼다.

- 특종은 기사가 아니라, 죽음을 담보한 역사로 써야 한다. -

13

12년 전 자정이 가까워지면, 인쇄소는 여느 때처럼 정신없었다. 종이 위로 잉크가 번지고, 컨베이어는 신문을 토해냈다. 퇴사 인사를 마치고 낡은 취재 수첩들을 가방에 넣을 때, 후임 기자가 능청스럽게 다가섰다.

“선배님, 취재 수첩 인수인계하셔야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며칠 전 우산을 씌워주던 그 기자였다. 나는 고인이 된 선배와 함께 드나들던 음식점으로 후배를 데려갔다. 예전처럼 설렁탕과 수육을 시키고 취재 후일담을 나누며 자정 가까이 술을 마셨다. 후배는 당직이라며 콜택시에 동승하자고 했다. 달라진 보도국 사무실 구경을 시켜준다던 그가 기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선배 그때 사건, 다시 써보면 어때요? 요즘은 진실 재조명 프로젝트 많잖아요.”

나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새벽빛 따라 드나들던 기자실에서 대답했다.

“진실이란 게 꼭 다시 써야 보이는 건 아니야.”

“그럼요?”

“가끔은……, 지워야 보이는 것도 있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청률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는 후배가 노트북을 펼쳤다. 나는 대검찰청 출입

기자에게 넘긴 원본을 복사해 둔 USB를 그에게 내밀었다.

“재판 중인 검찰총장 친구 전모를 너한테 맡긴다. 언젠가 네가 진실을 파헤친 특종 기사를 쓰고 싶을 때……. 잘 살펴봐.”

그 안에는 2012년 D저축은행 사건의 온전한 전말이 담겨 있었다. 후련한 기분으로 기자실을 묵묵히 살펴보았다. 오래된 키보드, 커피 얼룩, 세월이 쌓인 먼지들이 눈에 익숙했다. 사무실을 나오다가, 복사기에서 뽑아 든 종이에 짧게 적었다.

- 특종이나 르포는 역사적 기록이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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