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수습기자 시절 찾았던 어느 장례식장이었다. 살해당한 20대 여성의 빈소였고,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그는 울었는지 붉어진 눈으로 고인의 친구들 무리 사이에 끼어 있었다. 유족과 친구들에게 몇 가지 사실관계들을 묻다가 으레 그렇듯 그날도 빈소에서 쫓겨났던 기억이 난다. 며칠 후 범인이 잡혔다. 슬픔에 잠긴 것처럼 보이던 그 남자가 범인이라고 했다. 여자친구가 자신을 무시했고,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의심됐다는 것이 가해자가 진술한 범행 이유였다.
충격적인 경험이었지만 빠르게 무뎌진 이유는 비슷비슷한 사건을 그 후로 너무나도 많이 마주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가장 많은 이유는 ‘이별을 통보하거나 재결합을 거부해서’ ‘다른 남성과의 관계를 의심받아’ ‘홧김에’ ‘자신을 무시해서’ 등이다. 지난해 4월 경남 거제에서 한 20대 남성은 전 여자친구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찾아가 살해했다. 지난해 5월에는 서울 강남의 한 건물 옥상에서 또 다른 20대 남성이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살해했다. 지난주부터 이번주까지, 전 연인이나 연인의 손에 살해당한 여성은 보도된 것만 모두 4명에 달한다.
반복되는 교제살인 사건은 이미 여성들에게 일상의 공포다. 폭행이나 스토킹, 협박, 살인 등을 당하지 않고 연인과 헤어지는 것을 뜻하는 ‘안전이별’은 이미 신조어조차 아니다. 여자들은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고민하는 친구에게 흔히 이렇게 조언한다.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 말라고. 차라리 큰돈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서 서서히 정이 떨어지게 하라고.
그렇게라도 자구책을 마련하라고 조언‘해야’ 하는 것은 이별을 통보한 나를 공권력이 지켜주지 못하리라는 추측 내지는 확신 때문이다. 상당수의 죽음은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난해 4월 거제 교제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고, 11차례나 경찰에 신고했지만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대부분 쌍방폭행으로 처리되거나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를 근거로 수사가 종결됐다.
최근 사건들도 비슷하다.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에서 스토킹범에게 살해당한 50대 여성은 스토킹 신고를 3차례나 했었다고 한다. 28일에는 전 연인에게 스토킹을 당하던 20대 여성이 접근금지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했다. 다음날인 29일에는 대전에서 30대 여성이 폭행 등으로 4차례나 신고한 전 남자친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한국여성의전화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남편이나 남자친구 등에게 살해당하거나 살해 위험에 처했던 피해자와 주변인 650명 중 114명(17.5%)은 경찰에 신고하거나 피해자 보호조치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현행법에서 혼인이나 사실혼 관계가 아닌 연인관계에서 벌어진 폭력은 일반 성인 간의 폭행과 똑같이 다뤄 교제폭력의 특성이 반영되지 못한다. 이를테면 교제폭력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고, 보복을 무릅쓰고 처벌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기 어렵다. 접근금지 등 피해자 보호조치를 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몸집과 위력 차이가 대체로 크고, 평소 더 많이 폭행당하는 ‘주 피해자’가 있다는 점 등 젠더 간 폭력에서 나타나는 특수성도 고려할 수 없다. 대중적 이목이 쏠리는 교제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교제폭력을 별도로 정의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됐다가 논의 없이 사장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는 동안 법의 사각지대에서 막을 수 있던 죽음이 허무하게 계속된다.
위험을 감지하고 국가의 도움을 요청한 시민이 죽었다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의 직무유기다. 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팀이 쓴 책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에서 거제 교제살인 사건의 피해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전국에서 데이트폭력, 교제폭력으로 죽은 사람들 가족 한번 모아보세요. 이게 다른 사회적 참사들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똑같아요.” 모든 교제살인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