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대통령 탄핵, 뒤이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으로 대한민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유례없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정치적 불확실성 증폭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독일에서는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으면서 조기 총선을 치르게 됐다. 프랑스에서도 62년 만에 내각이 붕괴됐으며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역시 연합 정당이 등을 돌리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날 위기다. 지난 2년여간 인플레이션과 사투를 벌이던 세계 주요국이 정치 리더십 리스크에 휩싸이며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세계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시다발적인 정치 혼란은 우연의 일치일까. 이런 현상은 세계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세계적인 경제 석학 배리 아이컨그린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교수는 지난해 12월 26일(현지 시간) 서울경제신문과 진행한 신년 화상 인터뷰에서 “주요 경제권의 정치적 혼란은 경제적 양극화의 결과인 동시에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쇠퇴한 여파”라며 “동시에 금융 위기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나 중국 등 주요국과의 관계에서 그간 미국은 예측 가능한 중도적 입장에서 질서를 구축했다”며 “하지만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에서 손을 떼면서 여러 국가에서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야단법석(clamor)을 피우게 된 것”이라고 짚었다.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주요 동맹과의 경제·안보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게 되면서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이러한 혼란이 정치적 문제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금융 위기는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결합할 때 발생한다”며 “금융 불안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정부 역시 취약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발생한 크레디트스위스 위기를 사례로 들었다. 당시 크레디트스위스가 붕괴 위기를 맞았지만 스위스 정부가 UBS에 합병시키는 신속하고도 강력한 조치를 통해 위기는 곧 가라앉았다. 그는 “만약 지금의 독일이나 프랑스·한국에서 금융 불안 문제가 생긴다면 문제를 단호히 다룰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와 정부가 있는가”라고 되물으며 “나의 대답은 ‘아니오(No)’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불안이 증폭하면서 금융 위기의 위험 역시 고조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새로 출범할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위험을 안게 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대미 무역 흑자 증가로 관세정책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한국을 지목했다. 지난해 11월까지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493억 달러로 연간 기준 사상 첫 500억 달러 돌파가 확실시된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한국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응책은 대미 투자를 늘리는 것”이라며 “현대차가 미국 생산 비중을 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에게 한국이 경제 우방국이며 동맹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트럼프의 관심사이자 최근 한미 협력의 새로운 접점으로 꼽히는 조선업과 관련해서는 미국 내 산업적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봤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대부분의 조선 산업은 이미 중국으로 넘어갔다”며 “미국의 미래는 신산업과 응용분야, 인공지능(AI), 그리고 크리스퍼(CRISPR·유전자편집기술)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이 같은 분야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경제 개발사를 다룬 ‘기적에서 성숙으로’라는 책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아이컨그린 교수는 한국이 AI를 활용한 서비스업 생산성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 경제를 연구하면서 한국이 미국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낮은 이유가 서비스 부문 생산성이 미국보다 낮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냈다”며 “서비스 부문에 사용할 수 있는 AI에 투자한다면 한국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비스 부문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AI 패권 전쟁이 이미 알파벳이나 메타 등 미국 거대 기술 기업들의 자본력 전쟁 단계로 넘어간 것이 아닌지 물었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여전히 한국에 기회가 있다고 봤다. 그는 “한국이 이미 하고 있는 반도체 생산 시설 투자도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AI 개발뿐만 아니라 대규모 언어모델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답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개발된 기술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은 한국이 1960년대부터 써왔던 방법이고 이 전략은 지금도 유효하다”며 “한국은 섬유와 철강·조선·전자를 넘어 그다음 단계의 ‘기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달러화 환율과 관련해서는 “상승 요인은 이미 시장 가격에 반영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트럼프의) 정책이 실제로 시행돼도 달러 가치는 지금 수준에서 큰 폭으로 상승하지 않을 수 있다”며 “다만 트럼프 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하기 때문에 추가 상승 여지는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올해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부정적 공급 충격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것이고 감세로 인한 수요 증가도 인플레이션을 부를 수 있다”며 “연준의 금리 인하는 끝난 것 같고 오히려 금리 인상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