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공부 방식 / Another Kind of Learning
점령기의 앞부분 동안 나는 이포가 어떤 도시이고 그 주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배워 가며 그린타운의 아늑한 생활로부터 젖떼기를 한 셈이다. 사건도 많고 이동도 많은 시기였다. 우리 집은 네 차례 이사했고 나는 길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뒤쪽 2년간은 비교적 안정기였으나 뜻밖의 두 개 사건으로 내 생활의 틀이 바뀌었다. 묘하게도 두 사건 모두 전쟁 전에 학교에서 배웠으나 쓰지 않게 되었던 영어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하나는 영어책의 임시도서관과 관계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전쟁 뉴스를 듣는 비밀 단파라디오와 관계된 것이었다.
일본 당국은 아버지에게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 교육국 일에 참여하라고 요청했다. 아버지는 거절했으나 찬키예추(陳繼祖)를 위시한 지역 중국인사회 지도자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고 협력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이 권유의 뒤에서 협박을 느꼈으나 장학 업무에는 돌아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잡무나 맡겠다고 고집했다. 교육국의 일본인 책임자가 이에 동의했다. 그 책임자가 놀랍게도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직장에 돌아가 주인 잃은 책들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예전처럼 매일 아침 출근했다가 오후 늦게 퇴근하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문 공부방의 시간도 바꿔 저녁 후에 모이게 되었다.
아버지의 새 업무가 알고 보니 내게 노다지였다. 참혹한 과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그곳에 모인 책들이 있었다. 일본군 진주 전에 도망하거나 붙잡혀 싱가포르 감옥에 갇힌 영국인들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대중소설이 많았으나 핸드북, 가이드북 등 기술적 내용도 있었다. 많은 책이 상자도 풀지 않은 채 쌓여 있었고, 여기서 추려내 도서관의 뼈대를 세울 방침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데려와 책 정리와 목록 작성을 돕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현대소설을 읽어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고전한문이나 고급 중국어로 된 학술서만 사 왔고 어머니는 대중잡지 애독자였다. 집에는 신식 중국소설도 없었다. 영어책은 문학의 고전뿐이었다. 초서, 셰익스피어, 밀턴, 낭만파 시인들, 그리고 디포, 필딩과 디킨스의 소설 몇 가지. 아버지는 문학잡지를 정기구독하면서도 디킨스 이후의 창작물은 구입한 일이 없었다.
상자를 풀면서 그 시대 영문 대중문학의 보물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기 있는 작품들은 여러 권 중복해 나왔다. 애가서 크리스티, P.G. 우드하우스, 에드거 월리스, 에드거 라이스 버로즈 등이 확실한 인기작가였다. 벨기에인 형사 에르퀼 포아로가 너무 좋아 크리스티 작품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우드하우스는 처음에 소화하기가 좀 힘들었으나 그가 언어로 그려낸 영국적 심성에 차츰 맛을 들이게 되었다. 월리스에게는 심한 스릴러 중독증을 얻었고, 라이스 버로즈는 전쟁 전에 본 타잔 영화의 기억을 되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화성과 외계로 나를 불러내어 공상과학소설에 취미를 붙이게 해주었다.
그밖에 내가 끌린 것은 H. 라이더 해거드와 레슬리 차터리스의 작품들이었다. 해거드의 〈솔로몬왕의 금광〉을 통해 아득하고 낭만적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매혹되었고, 그 매혹은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차터리스는 새 방식으로 내 공부에 보탬을 주었다. 주인공 더 세인트의 수많은 모험은 쉽게 잊어버릴 만한 것이었지만, 페이지마다 길고 새로운 단어들을 써서 사전 찾는 습관을 길러주고 그 결과 내 어휘력을 크게 늘려주었다.
차터리스가 싱가포르에서 중국인 의사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고 그 아버지가 쑨원(孫文)의 1900년 싱가포르 방문 때 도와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후일에 알게 되었다. 전쟁 후 차터리스의 조카 하나가 말라야대학에 같이 다녔고 차터리스의 동생이 존경받는 성공회 신부로서 후에 싱가포르에 자리 잡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나중에 해외 중국인의 초기 역사를 공부할 때 홍콩과 그 일대 중국계 유라시안(아시아인과 유럽인의 혼혈) 자손들의 코스모폴리턴 성향을 흥미롭게 살피면서 차터리스 집안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제목만 알고 본 적이 없던 고전소설도 많았다. 19세기에 나온 오스틴, 브론테 자매, 디킨스, 새커리와 조지 엘리엇, 그리고 20세기 작가 두 사람, 콘래드와 하디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레오 톨스토이 등 유럽 고전작품의 번역판도 있었다. 다량의 대중소설을 즐겁게 읽어낸 실력으로 몇 개 고전의 완독에 나섰다.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위대한 유산〉, 〈두 도시 이야기〉 등이었다. 집중력이 필요한 읽기였다. 전쟁 끝나기 전에 더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버지는 1944년 말까지 도서 관리를 맡고 있으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대출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처음에 매주 두 권씩, 당연히 대중소설로 시작했다. 읽는 속도가 처음에는 느렸으나 어휘력이 늘고 문체에 익숙해지면서 차츰 빨라졌다. 저녁마다 읽어서 사나흘에 소설 한 권씩 넘기다가 얼마 후에는 매주 서너 권씩 읽어내게 되었다. 대중소설 읽는 사이사이에 고전작품도 이따금씩 끼워 넣었으나 스릴러, 탐정소설, 공상과학소설 같은 것이 역시 재미있었다. 그 해에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영어 능력이 엄청나게 자라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자가학습이 풍성한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한문 공부도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고전시대 시문(詩文)을 더 많이 읽게 하고 전에 배운 당대(唐代) 시문과 비교하도록 가르치셨다. 아버지가 짚어준 미묘한 요점들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꽤 많은 시를 외우기는 했다. 아버지는 또한 철학과 역사의 이해에 필요한 고전 산문을 가르치는 데 더 힘을 쏟으셨다. 〈논어〉, 〈맹자〉, 〈춘추〉(주로 좌씨전), 그리고 〈사기〉와 〈한서〉의 내용이었다.
그런 글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고 언젠가는 우리가 고전한문으로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분은 믿으셨다. 그때 그런 글의 내용을 내가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중에 중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왔을 때 대학 과정에 적응하는 데 초년의 이 훈련이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더 후에 1954년부터 말라야대학에서 남해(南海) 교역을 연구할 때 다른 전문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배경 덕분이었다.
아무튼 영문소설 읽기는 큰 행운이었다. 영어 쓰는 사람과 접촉이 전혀 없던 3년 반 동안 그 풍성한 언어세계로 나를 이어주는 구명선(救命線)이 되었다. 모르는 단어에 마주칠 때마다 아버지 영어사전을 뒤져보았다. 학교 시절 지도를 보고 지명 목록을 만들던 식으로 단어 목록을 매일 작성하면서 내 영어 독해력은 아버지가 놀라실 정도로 자라났다. 1944년 말 아버지가 교육국에서 사직하고 학까족 주석광산 사업가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실 무렵에 나는 영어로 못 읽을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더 읽을 책을 계속 찾고 있었다. 심지어 내 손으로 대중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영어 연습을 위해서라도.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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