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2024-09-24

추석 저녁,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이 마당에 서 있다. 아들이 입을 연다. “아버지, 형과 다투면 늘 저에게 참으라고 하셨죠. 보통 형이 저를 괴롭혔는데도 형에게 대들면 안 된다며 저를 더 나무라셨어요. 방금도 형이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반박하려는 저를 아버지가 끌고 나오셨지요. 다루기 힘든 형은 놔두고 저에게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드렸는데 또 이러시네요. 아버지가 제 마음을 무시하는 느낌이 듭니다.” 아버지는 답한다. “그럼 형제끼리 싸우는 걸 보고만 있느냐! 너희가 다투면 나도 스트레스 받는다. 그리고 내가 널 무시할 리가 있냐. 네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대화는 어떻게 끝이 났을까. 아버지와의 소통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기를 바랐던 아들의 기대가 크게 꺾였을 것은 분명하다. ‘속내를 말해도 돌아오는 것은 민감하다는 평가구나. 앞으로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상대에게 어려움이나 불편한 감정을 털어놓는 행동의 바탕에는, 상대의 이해를 구하거나 둘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상처를 내보이는 어색함을 견디고, 긴장된 분위기를 감내하며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아버지가 한 ‘예민하다’는 말은 결국 아들이 드러낸 감정이 그 상황보다 과장되거나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되어 아들의 입을 막는다. 이 지적은 아들의 감정의 의미와 경험을 가볍거나 상대적인 결과로 다루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아들에게 다시 한번 “네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어버렸다.

한편 아버지의 입장을 상상해보자. 아들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억울함을 느껴왔고 지금도 감정을 무시당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했을 때, 아버지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잘못해온 것인가, 내가 둘째녀석을 무시한 건 아닌데’ 하는 억울함이 밀려왔을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끼어드는데 하나는 늘 옳아야 한다는 강박이고 또 하나는 서열의식이다. ‘아니! 나는 형제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한 것인데! 애초에 싸우는 아이들이 잘못이지 말리는 데에 그렇게까지 공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아이들을 키우려고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런 일로 나를 원망하는 건가?’ 이런 생각들은 아버지에게도 분노를 몰고 오며 아들이 원하는 수용과 공감을 시작할 여유를 앗아간다. 더하여, 상대방에게 “네가 예민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거나, 타인의 감정을 감당하는 것이 불편하고 두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아들의 감정을 수용한 후 이에 대한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감정이 적절한지 부적절한지를 판단하는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아들의 입장을 적극 경청한다고 해서 꼭 그 의견을 다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어나 회피로 일관하는 것은 아버지의 감정적인 유연성과 소화력에 어려움이 있어서 아들과의 소통과 문제 해결보다는 자신의 심기를 지키고, 성찰을 멈추고, 지금의 권위를 지키는 것에 급급하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말하기 힘들었던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 감정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해결책과 조율안을 마련해갈 토양이 만들어진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육식을 줄이고 기업 변화를 촉구하는 노력을 유난함으로, 큰 규모의 딥페이크 성범죄가 드러난 후의 불안과 분노를 예민함으로 치부한다면, 변화와 발전은 어렵다. 그 예민함과 문제의식이 세상을 바꾸고, 약한 곳을 돌보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예민함, 너의 용기, 너의 그 유난한 열정이 고맙다라고, 격려하고 듣고 포용하는 어른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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