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은 국가 경제와 산업을 원활히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에 이른바 ‘산업의 쌀’로 불린다. 알루미늄이나 탄소섬유와 같은 다른 소재에 비해 저렴하고 융합성이 우수하여 건축, 자동차, 선박, 기계, 가전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기초 소재다.
열연강판이나 냉연강판, 전기강판, 철근, 형강, 선재 등 다양한 철강제품은 철광석이나 철스크랩 등의 원료를 녹여 쇳물을 만들고 이를 굳힌 다음에 압연, 압출, 도금 등 여러 형태로 가공하여 만든다. 이 과정에서 쇳물을 부어 최초로 고형화 한 상태를 조강(crude steel)이라 부르는데, 산업과 경제를 책임지는 철강 제품의 특성과 품질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조강에 있다. 유명 베이커리의 빵이 맛있는 것이 원재료와 반죽에서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강은 고층 건물이나 교량, 자동차, 조선, 가전 등 산업이나 일상과 밀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소재이기 때문에 저가 원료나 부정확한 배합으로 만든 것은 안전사고 등의 위기를 야기할 수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강의 중요성은 철강재에 대한 신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 각국은 조강을 기반으로 하여 철강 원산지를 관리하고 있다.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의 철강 원산지 판정 기준을 보면, 한국을 제외한 미국, 유럽, 일본, 영국 등은 조강을 기준으로 원산지를 판정하고 있다.
또한 조강 원산지의 영향력은 원산국 철강재에 대한 신뢰에서 제품 안정성과 원인 규명 등으로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미국은 지난 7월에 멕시코를 경유해 수입되는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인상한 바 있다. 여기에 적용된 것이 조강 기준 원산지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철강재를 마지막으로 가공한 국가를 기준으로 원산지를 판정하고, 수출 쿼터에 국산 물량을 산정할 때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 가령 중국산 조강이나 조강 가공품을 국내에 수입해 마무리 가공을 해서 기존 수입품과는 다른 HS코드를 적용하면 해당 제품은 한국산이 된다. 실제로 현행 원산지 기준을 적용해 외국산 조강제품을 한국산으로 수출하는 사례 늘면서 미국 등 해외에서 한국이 글로벌 철강 공급과잉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중국의 우회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한다.
철강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수출 우회지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피해야만 한다. 국내에서 조강 제조하는 철강사 뿐만 아니라 수입조강을 활용하는 업체들도 모두 한국산 쿼터 산정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 기초소재인 철강은 일반 소비자가 조강의 중요성을 쉽게 인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처럼 조강 원산지 구별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게 되면 저가의 잉여 철강재 유입이 계속될 것이고, 이는 국산 조강 베이스 제품과 수입 조강 베이스 제품의 경쟁 구도를 야기할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국내 철강사의 생산, 가격 결정력이 수입재에 의해 좌우되고, 산업 자생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철강 소재를 사용하는 수요산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은 원가 절감을 위해 저가 수입재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소재 조달의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고, 안전사고 발생 등의 위험이 수반될 것이다. 한국산 철강재에 대한 신뢰와 국가 철강 전후방 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지금과 달리 철강 제품 품질을 결정하는 조강이 원산지 표기의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
최근 포항시는 철강산업 위기로 비상회의를 열고 위기대응팀을 구성하면서 정부에 철강산업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요구했다. 여러 요구 사항 중에 국내 대기업들에게 국산 철강 구매를 의무화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 눈길을 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라 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산업 생태계의 강건화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