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비실. 물을 끓이는 주전자를 뜻하는 일본어 유와카시(湯沸し)를 우리식 한자 독음으로 그대로 읽어 유래된 단어다. 과거 탕비실은 글자 그대로 사무실 한편에 커피나 물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작은 주방이었으나 지금은 그 개념이 달라졌다. 탕비실은 ‘사내 카페’ ‘라운지’ ‘카페테리아’와 같은 이름을 달고 탈바꿈하고 있다. 각박한 일터에서 직장인들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오아시스이자, 사내 중요 정보부터 뜬소문까지 활발하게 오가는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탕비실’ 키워드를 꺼내 들자마자 여러 직장인이 할 말 있다며 손을 들었다.
■“우리 회사 탕비실을 소개합니다”
서울 마포구 망원역 근처에 있는 어크로스는 대중 교양서 전문 출판사다. 주택을 개조한 사무실은 포근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탕비실 한쪽에는 샌드위치와 토스트 등이 갖춰져 있다. 13인의 직원들은 회사를 일터라기보다 제2의 생활공간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어크로스 편집부 최윤경씨는 “직원 중 1인 가구가 많다 보니 탕비실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곤 한다”며 “아침에 바로 업무에 들어가다 보면 분위기가 경직되기 쉬운데 탕비실에서 직원들끼리 안부를 물으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가 업무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점심시간 탕비실에서는 직원들이 직접 싸 온 도시락으로 작은 모임이 열린다. 직원 생일이면 케이크를 나눠 먹는 파티도 연다. 탕비실 창으로 가끔 얼굴을 비치는 동네 길고양이는 어크로스 직원들에게 늘 환영받는 손님이다. 탕비실은 직장의 공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내 돈 주고 사기 쉽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구비된 탕비실은 어떤가. 회사 소개란에 언급해도 될 만큼 특별한 간식을 제공하는 회사도 있다. 1+1 할인 이벤트 때나, 술 취한 김에 사 먹는다는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곳이다. e커머스 전문 유통기업 유니토아는 2024년 상반기부터 경영진의 직원 복지 강화 정책으로 탕비실에 고급 아이스크림을 채우기 시작했다.
유니토아 마케팅팀 하지은씨는 “시즌별로 다양한 맛과 한정판 맛까지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직원들의 만족도가 크다”고 말한다. 개수나 횟수 제한도 없다는데, 직원들은 한 달에 아이스크림을 몇 개나 먹을까?
하씨에 따르면 매달 100~150개 정도가 소진된다. 재직 중인 직원은 50여명, 한 명당 한 달 평균 2~3개 정도 먹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탕비실 관리는 매월 팀별로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경영진의 후한 복지 정책에 화답하듯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정리정돈하며 청결을 유지하고 있다.
중고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의 탕비실 스케일은 ‘신상’ 스낵으로 채워진 편의점을 방불케 한다. 층마다 스낵바를 구비해 약 230명 구성원이 이용하고 있다. 번개장터 탕비실이 가진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간식 신청 제도’다. 원하는 간식을 언제든 신청할 수 있는 채널(단톡방)이 존재한다. 신청한 간식은 5일 이내 빠르게 스낵바 진열대에 반영된다.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 같은 특별한 기념일에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여름에는 아이스크림과 생맥주, 겨울에는 호빵과 호떡이 나온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핫하다는 맛집에서 공수한 다양한 스페셜 간식도 제공된다. 만족도는 물론 높다.
번개장터 박연정 매니저는 “맛있는 간식은 ‘오늘 신상 간식 먹어봤어요?’라며 자연스럽게 동료들과 말을 트는 대화 소재가 된다”며 “탕비실은 단순히 간식이 있는 공간을 넘어 직원들 간에 즐거운 소통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탕비실 관리 업체 “1위 간식은요…”
탕비실 스낵바가 직원들의 사기충천과 복지로 연결되다 보니 총무팀의 잡무였던 ‘간식 구매’를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업체도 생겨났다. 위펀은 기업 탕비실을 위한 스낵 구독 서비스 ‘스낵24’부터 기념일·명절 선물을 제공하는 B2B(기업 간 거래) 기업이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회의에 갈 때면 탕비실에서 콜라 한 캔을 꺼내어 들어간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을 증명하듯 위펀의 ‘2024년 판매 품목 TOP 15’ 데이터에 따르면 ‘코카콜라 제로’가 지난해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제로(무설탕) 음료가 나오기 전에도 해당 음료는 부동의 매출 1위였다는 것이 업체의 설명이다.
2030 젊은 층에게도 옮겨간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요즘 탕비실에도 반영되고 있다. 위펀의 주문 신청 사이트 검색어 1위는 바로 ‘제로’다. 위펀의 김민정씨는 “제로 제품의 주문량이 전년 대비 2배 상승했다”고 전했다. 구독 서비스의 주요 고객사가 젊은 세대가 많은 정보기술(IT) 기업이라는 점이 한몫했다는 해석이다. 김씨는 “건강과 운동에 관심 많은 세대라 ‘제로’와 함께 ‘단백질’ ‘프로틴’ 등이 함유된 간식의 소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맛밤, 고구마 말랭이, 견과류 같은 건강 스낵의 소비도 증가하고 있다. 김씨는 임직원이 많은 대기업의 경우 탕비실 간식비로 매달 억대를 지출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건강은 곧 원활한 업무와 직결되는 만큼 적은 예산으로 ‘가성비 스낵’을 채워 탕비실 구색만 맞추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스낵 구독 서비스 회사인 만큼 위펀의 탕비실도 고객사 못지않게 풍요롭다. 각종 스낵부터 샐러드, 샌드위치는 물론 한강공원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봉지라면 즉석조리기로 만드는 일명 ‘한강라면’까지 갖추고 있다.
■그는 왜 탕비실 빌런이 되었나…
탕비실은 드라마 속에서 온갖 사내 비밀이 누설되는 장소로 종종 등장한다. 현실은 그렇게까지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사내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해 출간된 이미예 작가의 소설 <탕비실>은 공용 싱크대에 안 씻은 텀블러 20개를 늘어놓는 자칭 환경운동가, 인기 많은 커피믹스를 잔뜩 집어다가 자기 자리에 모아두는 얌체, 사용한 종이컵을 절대 버리지 않고 정수기 옆에 쌓아두는 게으름뱅이 등 각 회사에서 뽑혀온 탕비실 빌런 7인 중 가짜를 찾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그려낸다. 그야말로 직장 생활의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름이면 직장인 커뮤니티에 매일같이 냉동실 얼음 틀에 물을 채우는 사람과 얼음을 꺼내 쓰기만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성토가 줄을 잇는다. 탕비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빌런’(악당)이라고 부를 만큼 탕비실은 직장인의 일상에 중요한 힐링공간이다.
직장인 노강민씨(가명)는 “탕비실 간식으로 ‘먹부림’을 부리는 동료를 보면 짜증을 넘어 환멸이 난다”고 말한다.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새 간식이 들어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제품을 싹 털어서 탕비실 스낵으로 자신의 서랍을 채우는 일명 ‘탕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탕꾸’는 그나마 회사 내에서 소진하니 양심은 있다는 반응도 있다. 퇴근할 때 가방에 과자와 음료수를 쓸어서 집으로 가져가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올 초 방송을 시작한 헤드헌팅 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에는 새로 들어온 동료에게 커피믹스 한 봉지를 건네며 이를 챙기는 것을 ‘소확횡’(소소하고 확실한 횡령)이라 지칭하는 직원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탕비실 빌런’의 행동이다.
간식을 가져가는 빌런들도 할 말은 있다. “회사에서 먹지 않는 자신의 몫을 집에 가지고 가는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 탕비실 간식 등 회사 소유의 물품을 임의로 가져가는 경우 비품을 관리하는 직원이라면 업무상 횡령죄에 해당하고, 일반 직원이라면 절도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얼마 전 탕비실 물건을 가져가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판매한 직원의 사례가 이슈가 됐다. ‘과자모음 170개 일괄’ ‘맥심 커피믹스 170개+아이스티 30개’ 등 출처가 탕비실로 의심되는 낱개 상품들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판매되는 것을 같은 회사 동료가 적발해 사내 게시판에 공론화한 것이다. 이후 해당 회사는 ‘회사 간식은 직원 복지 차원에서 제공되는 혜택이다. 개인적 이익을 위한 중고 판매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만약 회사 간식이 중고 사이트에서 판매되는 것이 발견될 경우 해당 직원은 회사 규정에 따라 엄중한 조치를 받게 될 수 있다’는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만원 한 장으로 점심 한 끼 해결도 쉽지 않은 요즘, 구직자들 사이에서는 구내식당이나 탕비실과 같은 ‘식생활 복지’도 중요한 지원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 평판·리뷰 공유 플랫폼 잡플래닛에서는 “각종 샐러드 무한 제공으로 건강 챙겨줌” “커피 제공 기업이라 커피값 안 들어 정말 좋음” “간식 제공(비어 있던 적이 없음)”과 같이 식비나 간식 제공을 회사의 최고 장점으로 뽑은 리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위펀의 김민정씨는 “직장인 커리어 플랫폼을 보면 기업 평가 중 ‘맛있는 간식이 많아요’라는 구절이 눈에 띌 만큼 탕비실 수준이 회사를 고르는 척도로까지 자리 잡았다”며 “탕비실 수준이 사내 복지부터 기업 이미지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경영학과 조성희 교수는 마이크로 브레이크(Microbreaks)가 업무 에너지 효율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마이크로 브레이크는 근무시간 중 짧게 자발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식 먹기, 동료와의 가벼운 대화, 스트레칭 같은 활동이 이에 포함된다. 탕비실을 그저 구색 맞추기용 간식 창고로 여겨서는 안 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