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박정희] ‘가난·민족적 차별 극복’ 위해 선택한 군인의 길

2025-01-16

(16) 박정희. 군인의 길을 걷다

한국사회의 ‘적과 흑’ 박정희·김수환

같은 시대 살면서 겪었던 경험도 비슷

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양식 제공

金, 국민들의 정신적 공허함 메워줘

소년 박정희, 역사서 읽으며 꿈 키워

소작인의 아들로서 배고픔·차별 겪어

일본인에 감시받는 상황 탈피 하고파

극복할 방법으로 ‘긴 칼 찬 군인의 길’

◇군인의 길, 신부의 길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작품 <적과 흑>에서 힘이 없고 가난한 청년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군인이 되거나 아니면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책 제목에 나오는 적(赤)은 군복, 흑(黑)은 성직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당시 출세할 수 있는 계급을 나타낸다고 한다. 1830년에 출간된 이 책의 배경이 된 시대상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왕정복고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전장에서의 활약을 통해 출세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에 신분 상승을 위해 신부가 되는 길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불러일으킨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스탕달은 이 책을 통해 소시민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꿈을 심어줬고, 귀족과 사제들에게는 또 다른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줬다.

근대 한국 사회에서 적과 흑으로 대표되는 인물은 아마 박정희(1917년)와 김수환(1922년)이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다섯 살이다. 박정희는 구미에서 태어났으며,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의무복무 기간을 채운 후 사표를 던지고 만주로 떠났으며,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다. 반면 군위에서 태어난 김수환은 대구교구의 추천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조치(상지)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한 후 사제의 길을 걸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후 1963년에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수환은 1951년 9월 15일에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1969년 한국 천주교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됐다.

박정희와 김수환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겪었던 경험 또한 비슷하다. 일본 유학시절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받았던 차별, 그리고 창씨개명이다. 특히, 창씨개명은 그 시대에 살았던 박정희와 김수환 뿐만 아니라 ‘서시’로 잘 알려진 시인 윤동주, 장면 총리, 그리고 전직 대통령인 김영삼과 김대중도 피해 가지 못했다. 창씨개명을 안 하게 되면 쌀 배급도 안 해주고 학교도 못 들어갔으며, 또한 사람이 죽어갈 때 입원도 안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진짜 친일파는 창씨개명을 안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는 역사적 멍애인 창씨개명을 기준으로 ‘적극적 친일’이니 ‘소극적 부일’이니 하면서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또 다른 상처가 아닐까 한다.

박정희는 열하성에서 만주군 소위로 근무했으며, 김수환은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어 일본 육군 일등병으로 치치시마에서 복무했다. 제국주의 일본이 2차대전에 패망하면서 박정희는 만주에서, 김수환은 일본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녹록하지 않은 해방정국을 거친 후 박정희는 산업화를 통해 5000년 동안 가난에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생물학적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양식을 풍성하게 제공했다. 김수환은 종교인으로서 국민들이 느끼는 정신적인 공허함을 메워줄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을 나눠졌다. 역사를 이분법으로 본다면 박정희와 김수환은 대척점에 있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보면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면서 물질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을 동시에 이루는데 지렛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왜 군인의 길을 걸었을까?

박정희가 군인을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소년시절 가졌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소년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 5학년 때 춘원 이광수의 장편 역사소설 <이순신>을 읽고 국난극복의 참길을 배웠으며, 6학년 때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그를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종신의 <박정희 대통령>에서 박정희 소년은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후 “학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도 말을 몰고 적진을 뚫고 다니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머리 속에 오락가락했습니다”라고 했다. 문경공립보통학교 동료 교사인 유증선(전안동대 국문학과 교수)은 “숙직실에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 놓은 박 선생이다.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다”라고 기억했다. 나폴레옹은 어린 소년에게 군인의 길을 보여주었고, 그 길을 통한 권력에의 의지를 처음으로 심어줬던 것이다.

둘째, 가난과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찾은 것이 군인의 길이 아닐까? 박정희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전근대적인 봉건시대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서 겪는 배고픔과 차별이다. 대구사학교범 시절 박정희가 결석률이 높았던 이유 중 하나는 집에서 부쳐주는 식비가 늦어지면 눈칫밥을 먹기 싫어 고향 상모리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결석일은 2학년 10일, 3학년 41일, 4학년 48일, 5학년 41일로 길어지면서 비례하여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입학시험에서는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3학년 74명 중 67등, 4학년 73명 중 73등, 5학년 70명 중 69등이었다. 이런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졸업 때 1등을 하여 만주국 황제 부의(簿儀)로부터 금시계를 탔으며, 일본 육사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알 수 있다. 셋째형 박상희는 조카 박재석을 보내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학비 후원을 받아 동생 박정희에게 전달하곤 했다.

특히, 5·16 이후 박정희와 반(反) 박정희 운동에 앞장섰던 장택상의 관계가 그 시대상을 잘 나타내준다.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은 처가의 위토만으로 도저히 생활이 안 돼 장택상의 선친 장승원 집안의 땅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조선의 거부집안 중 하나였으며, 경기도관찰사와 경상북도관찰사를 역임한 장승업의 아들 장택상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할 때도 조선총독이 마중을 나갔을 정도라고 했다. 그 당시 지주의 아들이면서 수도경찰청장과 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은 비록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통령 박정희이라 해도 한낮 소작인의 아들로 여겼다. 장택상은 당시의 ‘박정희 의장’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공식 칭호를 붙이지 않고, ‘박정희씨’ ‘박정희군’이라고 낮춰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장택상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말기 명문가나 지주들은 대부분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친일로 변절하거나 은둔하였다. 반면 그 자녀들은 해외로 유학을 보냈으며, 실용적인 학문 보다는 주로 인문학이나 신학을 배웠다. 이들은 해방후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지만 일부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민주투사로 변신하면서, 군인들이나 실용적 지식을 아래로 보는 고정관념은 버리지 못했다. 말년에 병이 든 장택상은 미국에 있는 딸의 초청으로 신병을 치료하고자 출국 수속을 밟았는데 외무부에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장택상은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전상서’라는 사실상 항복 편지를 청와대로 보냈다고 한다.

셋째,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으로부터 받는 민족적 차별이다. 일본 군국주의하에서 박정희는 일본 순사로부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는 상황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매우 컸다. 문경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상주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대구사범 동기생인 권상하(전대통령 정보비서관)는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를 찾아왔다. 머리를 길렀다고 질책하는 시학(장학사) 및 교장과 싸운 뒤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대구사범 교련주임 시절에 자신을 총애해 주었던 아리카와 대좌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열차편으로 떠나는 정희를 전송했다”고 증언했다. 생래적으로 차별을 싫어했던 박정희는 자주 일본인 교사들과 충돌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은 일본인 선생과 싸워 교사직을 그만둔 뒤 만주로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박정희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서 그리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겪었던 설움과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긴 칼 찬 군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제자인 주형배(전 초등학교 교장)는 “선생님은 그러면 이 담에 뭐가 될낍니까”라고 질문하자 박정희는 “나, 나중에 봐라 대장이 될란다. 전쟁에 나가서 용감히 싸워 이기는 대장이 될란다”라고 대답했다고 증언했다. 만주로 떠나기전 박정희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섭섭해 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모른다. 긴 칼 차고 대장되어 돌아오면 순사보다 너희들 선생이 더 높다”고 했다. 칼을 차고 싶다는 말은 선생으로서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나오는 울분을 폭발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한계점이 일찍부터 군문으로 입문하고 싶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군인의 길을 걷는데 마주친 현실적인 장벽

그러나 박정희가 교사를 그만두고 군인이 되기 위한 현실적인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먼저, 집안의 반대다. 가난한 시골 소년이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사범학교였다. 그 당시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직업인 교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호통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누나 박재희는 “동생은 가끔 내집에 와서는 ‘죽어도 선생질 못해 먹겠다’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 밤늦게 동생이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만주군관학교로 가기로 결심했다는 거에요. 아버님과 상희 형에게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호통만 들었다면서 만주로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몇일 뒤에 돈을 받아서는 본가에 들리지도 않고서는 만주로 갔지요”라고 증언했다.

둘째, 나이 문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만주군관학교 모두 입학하기에는 연령이 초과되었다.

당시 학교 숙직실에서 같이 생활했던 동료 교사 유종선의 증언에 의하면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고 하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라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입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고 썼으며,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결국 나이 문제는 인맥과 혈서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 라고 묻자 단순 명쾌하게 이야기 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이는 이낙선 비망록과 비슷하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 초과였으며, 만주군관학교도 연령 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만주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 이 신문을 보고 울산 출신 강재호 대위가 인도인이 되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동기생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만주국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오길래 시험 감독관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의 자리에 앉는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고 한다.

◇근대국가의 지향점은 부국강병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지상낙원은 ‘대동사회’나 플라톤의 ‘공화국’이다. 서양은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일찍부터 사관학교를 만들어 유능한 장교를 양성했다. 2차대전을 이끌었던 영국 수상 처칠은 센드허스트 사관학교를, 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은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중국의 장제스는 쑨원의 혁명사상에 관심을 갖고 군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건너가 유학을 준비했지만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를 받지 못해 귀국한 후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근대화에 늦었던 독일과 하급 사무라이 계급이 근대화를 주도했던 일본도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렇다면 유교적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은 부국강병의 기반이 되는 장교를 어떻게 육성하였는가? 그 당시 조선을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던 청, 일, 러시아 등 외교관들이 오히려 조선으로 하여금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군사력을 키울 것을 건의했다.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을 받아 1883년 육군 도야마학교(戶山學校)에 서재필 형제를 포함한 14명의 유학생을 보냈다. 그러나 유학생들이 돌아왔을 때 민영익은 청의 군사교관 다섯 명을 채용함으로써 그들의 역할은 없어졌다.

조선은 초급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1881년 사관생도대, 1894년 말에는 훈련대를 설립하였지만 각각 임오군란과 을미사변으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1896년에는 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이마저 1909년 9월에 폐지되었다. 무관학교 교육생들은 일본육군 유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 26~27기로 들어갔다. 홍사익 중장, 이응준 대좌, 신태영 중좌 김석원 대좌 등 33명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홍사익은 전범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대부분 해방 후 창군 작업을 담당하게 된다.

박정희가 태어난 1917년 조선은 부국강병에 실패하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대였다. 이처럼 일제 식민지 시대에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국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해방 후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해방의 기쁨도 잠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동기생과 선후배들이 마주한 것은 가혹한 현실이었다. 이런 모순은 그 당시 지배계급의 책임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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