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영(1906~1988)이라는 한국 여성 예술가를 아시나요? 5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절필시대’ 전시에서 소개한 유일한 여성 화가였습니다.
평양 태생으로 여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고, “가정을 이루더라도 작품 활동은 계속한다”는 조건을 걸고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웠을 리 없습니다. 결혼 후 그는 둘째 아들을 병으로 잃은 뒤 화업(畵業)을 포기했고, 남편이 납북된 뒤 홀로 네 자녀를 키우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전시장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마주하고 느꼈던 놀라움과 아쉬움, 서글픔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11월 17일까지) 전시가 그에 대한 기억을 다시 소환했습니다. 올해 천경자(1924~2015)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막한 이 전시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와 제자 등 여성 작가 23인을 조명합니다. 동양화, 한국화를 기반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서 작업해온 여성 예술가들입니다.
들여다보니, 이들이 걸어온 길도 쉽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로서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목표 외에도 이중고, 삼중고를 겪었습니다. 첫째, 시대의 무게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그리고 1980년대까지 요동친 역사의 굴곡 한가운데 그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동양화로 작업을 시작한 이들에겐 해방 이후 한국적인 재료와 소재, 기법으로 한국 고유의 회화를 해야 한다는 과제도 꽤 무거웠습니다. 셋째, 결혼과 출산, 가사를 병행하며 작업을 지속해야 했습니다.
시대를 읽고, 여성 예술가들이 처했던 환경을 생각하면 여기서 만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하나하나 애틋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류민자 화백(82)도 그중 한 명입니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 1세대 화가 하인두(1930~1989)의 아내이자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 예술가 하태웅과 하태임, 하태범의 어머니로 유명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의 강력한 존재감을 볼 수 있습니다. 이숙자(82)도 있습니다. 그의 다채로운 작업 여정을 따라가 보면 그를 ‘보리밭 화가’의 틀에 가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 밖에도 이화자(81), 오낭자(81) 등 우리가 다시 돌아보고 재조명해야 할 작가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선 이 전시뿐만 아니라 지난 8월부터 새로 시작한 천경자 컬렉션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깊어 가는 가을을 만끽할 시간입니다. 전시는 모두 무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