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생존권을 실현하기 위한 대표적인 복지제도이다. 그런데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무는 ‘비수급 빈곤층’이 46만 가구, 66만 명에 달한다. 비수급 빈곤층이란 소득인정액이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기준인 중위소득 30% 이하와 의료급여 기준인 중위소득 40% 이하에 해당하지만, 해당 급여를 받고 있지 않은 가구를 말한다. 전체 수급 대상이 165만 가구, 228만명이라는 점을 보면 10명 중 3명은 수급 대상임에도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비수급 빈곤층의 규모가 크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의 기초생활보장 실태조사 및 평가 연구에 따르면 비수급 빈곤층은 의료비 부담, 공과금 미납, 냉난방 포기, 주거 불안 등 여러 지표에서 수급자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조사를 통해 추정 가능하다. 중위소득 30% 이하 비수급 빈곤층을 대상으로 기초보장급여를 신청하지 않은 이유에 관해 물었더니 ‘신청기준이 엄격해서 신청해도 안 될 것 같아서’라고 답한 비율이 35.4%로 가장 크고, 11.9%는 ‘신청절차가 복잡해서’, 5.6%는 ‘제도를 잘 몰라서’라고 답했다. 또, 기초생활보장 급여 탈락 사유를 묻는 질문에는 ‘부양의무자 기준 초과’가 34.5%로 가장 크다. 즉, 복지 사각지대를 양산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엄격한 신청 기준과 부양의무제가 지목된 것이다.
부양의무자란 가족 구성원 중 부양할 책임이 있는 사람을 뜻하며, 현재 부양의무자 기준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중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만 남아 있다. 만약 1촌 이내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가 있다면, 해당 가족에 의해 실제로 부양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수급자가 추가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최소한의 생계를 여전히 가족에게 떠넘기는 구시대적 제도다. 가족관계가 단절되거나 사실상 부양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서류상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에서 배제되는 것은 명백한 불합리다.
부양의무제 폐지와 함께 반드시 추진해야 할 과제가 있다. 바로 ‘신청주의’ 폐지다. 부양의무제가 폐지된다면, 신청자의 소득과 재산만 국세청을 통해 확인하면 돼서 복잡한 절차가 간소화되고 행정비용이 절감된다. 그렇게 되면 신청주의를 지급주의로 개선하는 일도 더욱 수월해진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반드시 신청해야만 급여를 받을 수 있다. 빈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모욕을 견뎌야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이다.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고, 신청주의를 자동지급으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한 행정개혁이 아닌 국민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신청주의는 매우 잔인한 제도”라고 지적하며 자동지급 검토를 지시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가처분소득 기준 상대적 빈곤율은 14.9%로, OECD 평균 11.4%보다 높고, 38개국 중 9번째다. 시장소득 기준으로는 오히려 OECD 평균보다 낮게 나타나는데, 이는 한국의 빈곤 완화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지난 15일, 보건복지부 국정감사를 통해 정은경 장관에게 해당 문제를 지적하자, 생계급여는 단계적 폐지 방안을 검토 중이고, 의료급여의 경우 부양비를 폐지하고 부양의무자 조사는 간소화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신청주의에 대해서도 법 개정을 포함하여 폐지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의지가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조속한 제도개선을 촉구한다.
박희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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