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한국 핵추진 잠수함 보유 합의”.
중앙일보 2017년 9월 20일자 1면 톱기사 제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알렸던 지난달 30일보다 8년 전이었다. 당시 중앙일보는 “한국과 미국 양국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오보였다. 사정이 있었다.
재처리·농축 허용 민감한데도
원잠 포함 한꺼번에 받으려 해
‘한국 본심 핵무장’ 오해 살 수도
다 얻으려면 끈질긴 협상 해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틀 후인 9월 22일 미국 뉴욕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났다. 문 전 대통령은 뉴욕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원잠(※중앙일보는 ‘원잠’으로 표기) 보유’에 대한 확답을 받을 줄로만 알았다. 앞서 그해 6월 30일 첫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은 미 해군의 구형 원잠인 LA급 1척을 사겠다는 의사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했던 터였다. 당시 한국은 거세지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억제할 ‘한 방’이 절실했는데, 그게 바로 원잠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2017년 다 된 줄 알았다가 헛물 켜

그때 평화군비통제비서관이었던 최종건 연세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유튜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첫 정상회담에서) ‘그래? 왜 한 대(척)만 필요해요? 두 대(척)를 사 가세요’라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되레 적극적으로 나오니 청와대는 ‘다 됐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 여권 관계자가 “문 대통령은 미국 뉴욕 순방에서 역대 어떤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낼 것”이라고 주변에 자랑했다. 중앙일보가 이걸 잡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뉴욕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원잠 판매가 어렵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미국 국내법과 규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 관련 법과 규정은 핵무기 확산 금지(비확산)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LA급 원잠은 핵무기 핵물질로 쓸 수 있는 90% 이상 고농축 우라늄이 동력원이다. 미 국무부와 에너지부의 ‘비확산 마피아’가 강하게 반대했다. 친한파로 알려진 제임스 매티스 당시 미 국방부 장관도 반대파였다.
미국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던 청와대는 ‘닭 쫓던 개’의 처지였다.
지난달 29일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경주 정상회담에서 공개적으로 “핵추진 잠수함의 연료를 우리가 공급받을 수 있도록 결단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국의 방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군의 부담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 등 트럼프 대통령의 구미를 당길 언사도 섞었다.
이 대통령은 “디젤 잠수함은 잠항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이나 중국 쪽 잠수함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라고도 했다. 승부수였다. 위성락 안보실장은 나중에 “특정국 잠수함을 지칭한다기보다는, 북한·중국 쪽 수역에서의 잠수함 대처”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쪽…’은 한국 원잠이 대중국 견제 작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었으리라.
이 대통령의 도박은 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날 승인을 밝혔고, 백악관은 지난 14일 발표한 팩트시트에서 “미국은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를 승인했다. 연료 조달 방안을 포함해,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 원잠은 이로써 끝이 아니다. 끝의 시작도 아니다. 시작의 끝일 것이다. 앞으로 실무 협상과 미 의회를 거쳐야 하는데, 이게 지난한 과정이다. 미 측 실무 협상단은 비확산 마피아 위주로 꾸려질 게 뻔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장악력은 내년 중간선거 이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팩트시트는 양국 정상의 합의 사항을 담긴 했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는 ‘보도자료’에 불과하다.
이처럼 원잠에 대한 한·미 합의사항의 기반이 탄탄하지 못한데 우리가 무리수를 뒀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원잠 건조 승인과 한국의 플루토늄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을 사실상 막고 있는 한·미 원자력협정의 개정을 미국으로부터 한꺼번에 받아내려 한다는 점에서다. 정부는 정상회담 이전 물밑에서 미국과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논의하면서 큰 틀에서 합의에 이른 상태였다고 강조했다. 관련 사정을 잘 아는 정부 소식통은 “원잠은 한·미가 사전에 조율한 정상회담 의제가 아닌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호주는 재처리 등 빼고 원잠만 따내
한국이 원잠과 재처리·농축을 한꺼번에 달라고 하니 미국이 처음에 의아해하다가 나중에 의도를 의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의 입장에선 한국은 핵개발 ‘전과’가 있는 데다, 미국이 핵 기술 이전을 제한할 수 있는 ‘민감국가’며, 국내에서 핵무장 여론이 높은 나라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팩트시트에서 한국의 재처리·농축에 대한 대목에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에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등 3중 ‘자물쇠’를 달았다. “마지막 1~2분 전까지 의견 조정이 있었다(위 실장)”는 게 이들 문구로 보인다.
다수의 당국자와 연구자는 미국이 원잠과 재처리·농축을 하나의 사안으로 바라볼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호주가 지난해 미국·영국과 원잠 협정(NNPA)을 맺으면서 재처리·농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미 조야에선 비확산 마피아가 “핵잠과 재처리·농축을 동시에 얻으려는 한국의 본심은 핵무장”이라는 여론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의 오락가락한 태도는 미국 비확산 마피아의 ‘합리적 의심’을 굳힐 여지를 주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11일 “정부 차원의 논의를 통해 ‘핵잠’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해군은 법률과 행정 문서에서 ‘원자력추진 잠수함(원잠)’이라는 용어를 써왔다. ‘핵추진 잠수함(핵잠)’은 핵무기를 연상케 해 괜한 오해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민이 익숙한 용어”라고 국방부가 해명했지만, ‘정부 차원의 논의’는 결국 대통령실 의중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정부 소식통은 “대통령실은 자체 핵무장을 지지하는 보수층까지 소구하려고 ‘핵잠’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가 원잠과 재처리·농축을 다 얻으려면 냉정하고 끈질긴 협상만이 답이다. 또 헛물만 켜지 않으려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