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경제의 모든 활동은 '보이지 않는 믿음'에 기초한다. 사실 이 같은 신용사회는 인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산업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 시대 상에 맞춰 변모해오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기록 문자는 신용 거래 기록이며, 중세 시대 상인들의 서신증서는 '믿고 거래한다'는 교환경제의 시작점이었다. 이후 자본주의와 금융심사 자동화 시대가 열리면서 신용경제의 주체인 금융기관과 소비자, 신용정보사간의 질서정연한 규율에 기반한 신용평가 모형이 신용사회의 주요한 시스템으로 자리잡게 됐다.
문제는 현재의 신용평가 방법론이 과거 오랜 기간 축적된 데이터와 통계적으로 검증된 규칙에 기초하기에 매우 안정적인 반면 산업의 변화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빅데이터를 활용한 데이터 경제로 급격히 전환되면서, 몇년 전부터는 신용평가 또한 오래도록 답습해온 기존의 방법으로만 행해질 수 없다는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대두됐다. 종래에 기술적 어려움으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일상 속 비정형 데이터가 인공지능(AI), 분산처리 등의 혁신기술을 만나 정형화된 데이터로 분석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곧 과거의 신용거래 이력이 별로 없는 사람도 신용을 평가할 수 있게 된다는 신용사회의 규율 체계 변화로 이어졌다. 빅데이터로부터 추출한 디지털 흔적을 다양한 관점으로 판단해 개인의 신용력 평가에 있어 원래 중요했던 '약속을 잘 준수하는(상환의지) 사람들'을 추가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오직 금융정보만으로 판단해 은행이 거절했던 중저신용자나 주부, 청년, 외국인 등의 씬파일러(Thin-filer)들의 금융접근성 개선이 가능해졌다.
이같은 산업과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금융 선진국은 이종산업간의 데이터 교류와 결합, 혁신적인 AI 금융 기술을 토대로 대안데이터를 활용한 금융사각지대 해소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영국의 에이레(Aire)는 머신러닝 기술로 청년, 자영업자, 씬파일러를 대상으로 성격과 능력을 점수화하고, 이를 통해 신용위험을 측정하고 있다. 미국의 언스트(Earnest)는 개인의 교육 수준이나 고용 상태, 재무 프로그램 등을 데이터화해 미국의 전통적인 신용점수(FICO점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위험을 평가하고 있다. 대안데이터가 여는 새로운 신용사회가 금융의 '뉴노멀'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양상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현재 국내 신용평가 시스템은 보유 대출과 카드정보, 카드 거래 이력과 연체이력정보의 범주 내에서 정형화할 수 있는 20개 이내의 정보만을 활용해 신용도를 평가한다. 주부, 사회초년생과 같이 금융이력이 부족한 이들은 전 국민 4명 중 1명 꼴인 13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기존 신용평가 틀 안에서 평가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저신용업권으로 몰리는 실상이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선진 금융기술이 부재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필자가 속한 회사의 AI 금융기술 연구팀이 통신대안평가(EQUAL)와 함께 전 국민이 골고루 보유한 통신3사 정보를 활용해 AI 신용평가 모델에 접목한 결과, 현재 신용평가의 부정확으로 발생하는 씬파일러의 신용 악순환을 약 45% 개선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신용평가 체계에서 거절된 고객을 통신대안평가정보를 활용해 보완할 시 약 18% 고객의 추가 승인을 기대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기존 신용평가 시스템을 보완하면서도 금융 포용성을 확대하는 셈이다. 또 AI 신용평가 모형에 통신 대안평가정보를 결합할 시 금융이력 부족자가 5년에 걸쳐 만들어 내는 신용이력을 고신용고객으로 세밀하게 분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곧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신용사회를 맞이할 수 있는 사회적 제반도 이미 마련돼 있다. 2020년에 신용정보법이 개정되면서 마이데이터 사업과 대안신용평가 스몰라이선스가 도입됐고, 이어 2021년에는 16년 만에 비금융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신용평가업이 허가됐다. 이와 함께 지금 이 순간도 국내의 내노라 하는 렌딩테크(Lending Tech), 핀테크 기업들이 보다 정교한 신용점수 산정을 위해 AI, 머신러닝 등 다양한 금융 기술 연구와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반복되는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업간의 컨소시엄이 촉진되고,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금융지형을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아닐까. 거절할 대상자를 쉽게 걸러내기 위한 신용평가가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다양한 관점으로 찾아내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신용사회가 곧 '뉴노멀'로 자리 잡기를 고대한다.
이재균 피에프씨테크놀로지스 사업총괄(CBO) jaekyoon@pfc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