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스며든 소음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신음 소리"

2025-12-28

청와대 인근 이층 집에서 증조 할머니 때부터 50년 간 살아온 3대 가족이 있다.

삼엄한 경계 덕에 도둑 한 번 들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확성기 구호와 함성 등 시위 소음이 집안으로 스며들면서다.

한쪽의 환호가 다른 쪽의 절망이 되는 정치적 분열과 대립은 맞불 시위로 이어지며, 가족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다큐멘터리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24일 개봉)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권력의 중추 옆에서 살아온 가족의 일상을 통해 시대 변화를 조망한 작품이다. 올해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새로운 시선상'을 받았다.

다큐를 연출한 안소연(30) 감독은 영화 연출을 전공한, 이 집안의 손녀다. 24일 경복궁 근처 카페에서 만난 그는 다큐의 원래 취지는 '고발'이었다고 했다. 청와대 인근 주민들의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4년 전부터 시위 소음을 측정하고 민원을 제기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 고통이 끝날 줄 알았는데, 반탄 시위대가 바통 터치하듯 몰려왔어요. 문재인 정부 때 시위가 더욱 심해지면서, 우울감과 무기력함에 시달렸습니다."

작품의 시야를 넓힌 건, 자신의 가족사와 정치사가 맞물려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이후 "가족의 특별한 경험을 사회적 화두로 확장하는 시도"를 했다.

다큐는 집 수리하러 지붕 위에도 못 올라가고, 자고 일어나니 대문 앞에 경비 초소가 생기는 등 살벌했던 군부독재 시절의 경험을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담아낸다.

할머니의 가계부에서 안 감독이 주목한 날은 1979년 10월 26일이다. 격동의 그날, 할머니는 가족 밥상을 위해 시장에서 조기와 밤을 사왔다.

정치적 격변의 시간에도 가족의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상 계엄 당시, 고교생이던 아버지는 교통 통제와 시위로 도로가 막혀 산을 타고 귀가해야 했다.

다큐는 청와대 앞에서 이뤄진 문재인 전 대통령의 퇴임 연설 장면을 비중 있게 다룬다.

"가장 먼저 한 말이 청와대 인근 주민들에 대한 사과와 감사였어요. 문 정부 내내 시위 소음과 교통 통제로 고통받은 게 생각나 눈물이 나더군요. 잠시나마 우리를 해방시켜 준 건 코로나19였습니다."

윤석열 후보의 당선은 가족들에게 예상치 못한 결과였지만,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란 공약 만큼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큐에서 안 감독의 아버지는 "이젠 용산 주민들이 매운 맛을 보겠네"라고 말한다.

청와대 개방 첫날, 할머니와 함께 수십년 간 애증이 쌓인 '이웃집'을 처음 방문한 안 감독은 "범접하기 힘든 권력의 중심이 하루 아침에 관광지가 된 현실이 당황스러웠다"고 돌이켰다.

시위로 인한 고통이 특정 지역 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안 감독은 보수단체 시위로 몸살을 앓는 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로 향했다.

"양산 주민들의 고통이 코끝이 찡할 정도로 와 닿았어요. '조용하고 평화롭던 동네가…'라는 한 주민의 혼잣말은 늘 우리 가족이 했던 말이었죠."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되찾은 집안의 평화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 계엄 선포 이후 다시 광장을 채운 찬탄·반탄 시위로 깨지고 만다. 안 감독은 "우리 집을 채웠던 소음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신음 소리였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청와대로 돌아오면서, 주민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고 안 감독은 말했다. 그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해 사회 전체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며 "주민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위 관련 규제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큐는 할머니가 자식과 손주들이 태어났을 때 정원에 심은 나무들을 손질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집과 가족을 지키려 애쓰신 할머니의 모습이 나무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이 혼란스럽고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나무들은 조용히 뿌리 내리며 자라잖아요. 우리 민주주의도 그렇게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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