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길목에 맨드라미가 피었습니다. 영락없는 수탉의 볏입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 무색하게 화단이 오래 붉네요. 한나절 꿈꾸는 맨드라미 뒤편에 병풍처럼 호박 덩굴이 들러리 섰습니다. 앞에는 일일초가 분홍 분홍거립니다. 한 폭 완성입니다.
장미꽃을 안개꽃으로 감싸지요. 안개꽃 다발이 아니라 장미꽃 다발인 건 장미꽃만 보이기 때문이지요. 분명 이름이 있으나 따로 불러주지 않고 분명 모양이 있으나 못 알아채는 안개꽃, 그러나 안개꽃 없는 장미꽃 다발 본 적 없습니다.
피아노 콘서트였지요. 베를리오즈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한 편의 시”라 했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였습니다. 피아니스트 왼쪽에 페이지 터너가 있었습니다. 분명 앉아있으나 알아채는 이 없었지요. 있으나 없는 그가 악보를 넘겼습니다. 꽃다발은 당연히 피아니스트 몫이었고요.
세상에는 있으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무대 위 페이지 터너가 그렇고, 피아니스트에게 안겨지는 장미꽃 다발의 안개꽃이 그렇고, 저 풍경 속 호박 덩굴과 일일초가 그렇습니다. AI로 호박 덩굴을 지웁니다. 일일초를 들어냅니다. 영, 어색한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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