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은 사회과학이다

2025-02-18

윤석열 정부의 의료 정책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으로 상징되는 ‘대란’ 이미지가 전부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다수 시민들은 이 문제의 근본 성격을 잘 모르고 있다. “의료는 사회 문제”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사회가 ‘붕괴’된 것일까. 윤석열 정부의 정책으로 불과 1년 만에 의료 체계도 사회도 붕괴된 느낌이다. 의대 정원 논란은 이미 많은 이의 영혼과 몸을 파괴했지만, 이후 어떤 형태로 더 큰 후유증이 드러날지 겁이 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의 ‘2024년 한국복지패널 조사·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최근 1년간 가족 간 근심을 초래한 요인으로 ‘가구원의 건강’을 가장 많이 꼽았다.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고 답한 가구(53.81%)를 제외한 나머지 가구를 대상으로 1순위 응답 항목을 살펴보면, 54.85%가 ‘가구원의 건강’을 가족 갈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부채 문제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18.19%로 뒤를 이었고, ‘가구원의 취업 및 실업’이 8.34%로 세 번째를 차지했다. 흔히 생각하는 ‘자녀 교육 혹은 행동’(4.7%), ‘주거 관련 문제’(4.15%), ‘자녀의 결혼 문제’(3.74%), ‘가구원 간 관계’(2.92%)는 상대적으로 응답률이 낮았다. 특히 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을 소득 집단별로 살펴보면, 가족 구성원의 건강 문제는 저소득 가구(중위소득 60% 이하)의 61.12%가 가족 갈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했다(조선비즈 인터넷판 2025년 1월17일자).

평소 금전 문제, 인간관계, 가사노동 분담이 가족 내 가장 큰 갈등이라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의외의 조사 결과다. 하지만 인간의 근원적 고통이 생로병사이고 당대는 그러한 인간의 조건이 경제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니 가족 구성원의 건강이 최고 이슈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경쟁 사회에서 건강을 잃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 공포다. 가족이 아프면 의료비와 더불어 돌봄 갈등이 생기기 때문에 결국 관계 갈등을 가져온다. 내 또래 지인들이 소식이 뜸하다가 연락이 되면 거의 “간병 중”이다. 그들의 호소를 들어보면 건강 약자에는 아픈 사람만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방의학 전문의이자 사회운동가인 김명희의 <가장 평범한 아픔-모두의 건강권을 찾아서>는 지금 한국 사회의 의료 문제에 대한 가장 전방위적인 보고서이자 처방전이다.

우리가 스스로 ‘간사하다’고 느낄 때 혹은 ‘돌변’할 때는 아플 때와 안 아플 때 사이다. 나는 나 자신의 발상의 전환을 위해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이 책은 우리가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는 보건의료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제공한다. 내 생각에 이 책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건강과 사회’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방대한 외국의 사례와 의학사(醫學史)는 한국 의료 현실에 대한 대안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주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독후감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는 ‘완벽한 건강’ 신화가 지배하고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아플 수 있는데,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의료 기술 발달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건강하지 않고선 이 시대를 살아낼 수 없다는 두려움이 만난 결과다. 문제는, 의료 기술 발달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학 기술이 발전해도 한국에서 빈발하는 ‘재래형 산업재해’는 사회적 각성 없이 막을 수 없다.

‘나이 들고, 아프고, 돈 없는’ 세 가지 상태의 결합은 서러움을 넘어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최악의 두려움일 것이다. ‘돌봄 살인’은 극단적 사건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의 일부이다.

건강은 사회의 효과

모든 인간사에서 개인적인 것(the personal)은 곧 공적인 문제(the public)이다. 순수하게 개인적인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중 질병과 의료 체계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의료가 공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고 말하지만, 건강은 개인의 책임 영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인명재천은 기본이고, 건강은 개인의 관할하에 있지 않다. 최근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들이 폐암으로 사망하거나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데 간암 말기라는 사례를 종종 본다. 사인이나 병인을 어떻게 정확히 알겠는가마는, 분명한 사실은 건강이 개인의 자기계발 1순위 실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개인의 건강은 사회적 환경이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가장 평범한 아픔>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자유주의의 아이콘 마거릿 대처는 ‘사회란 없다. 다만 개인과 가족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실로 대단한 기만이다. 우리 각자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이 사실은 나만의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순간, 개인들의 생애가 모여 사회의 역사가 되고 역사 속에 개인의 삶이 배태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바꾸어나갈 힘과 의지를 얻게 된다.”

대처가 말한 ‘사회는 없다’는 그 자체로 사회를 보는 시각을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생존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그 개인의 배경이 되는 가족에 달려 있다는 이데올로기 역시 사회를 보는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몸은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의 효과다. ‘내 몸’이 아픈 것이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고유한 ‘내 몸’이란 없다. 몸은 언제나 사회적 몸(social body), 마음과 정신이 깃든 몸(mindful body)이다. 그냥 몸(body)은 영어로 ‘시신’을 뜻한다.

안 아픈 곳이 없는 사람들의 시대에, 완벽한 건강의 신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근본 문제다. 사람들은 이유를 찾아 헤매고, 우리가 시선을 두는 모든 곳에는 각종 의약품과 건강보조식품 광고가 자리하고 있다. 모두가 아픈데 건강 약자를 ‘루저, 관리가 안 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건강 이슈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영역이 있다. 한 사회의 의료 보장 체계, 정치적 상황, 산업, 개인들 사이의 위로와 공감…. 이 모든 것이 상호작용한다. 최근 ‘내란 폭식’ 같은 현상은 그 대표적인 상호작용이자 증상일 것이다. 유전이냐, 환경이냐, 사회가 문제냐, 개인이 문제냐 같은 사고방식을 넘어서 사회 구조 개념 안에 ‘개인적인 것, 부수적인 것, 사소한 것’ 등 우리의 일상을 개입시켜야 한다. 개인은 그 어떤 순간에도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 젠더, 나이 등의 요소가 체현되지 않은 순수한 몸은 없다.

미셸 푸코는 ‘사회적인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사상가다. 사회 밖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라는 어항에서 사는 물고기와 같다. 개인은 실체적·물질적 존재라기보다는, 개인을 개인으로 생각하게끔 하는 담론 과정의 산물(효과)이라고 본다. 개인이나 인간과 같은 개념을 포함, 그 어떤 것도 자명한 개념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의사 면허는 사회와의 계약

<가장 평범한 아픔>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19세기 위대한 병리학자이자 사회의학자인 루돌프 피르호는 말했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대규모의 의학이나 다름없다. 사회과학으로서, 인간에 관한 과학으로서, 의학은 문제를 지적하고 그 이론적 해결책을 꾀해야 하며, 정치인은 실천적 인류학자로서 그 실질적 해결 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의사는 기본적으로 사회운동가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의사 면허를 신분증으로 아는 일부 의사들의 전문가주의나 특권의식은 사실 그들 스스로를 다른 지식이나 소속된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사고방식이다. 외국의 역사에는 사회주의자나 혁명가 중에서 의사가 많았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나 체 게바라가 대표적일 것이다. 미국에는 올리버 색스나 어빈 얄롬처럼 인문학자로서 글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 의사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사회 의사’가 드물다.

저자는 의사 면허가 신분증이 아니라고 말한다. 의사 면허는 ‘고귀한 직업’을 증명하는 증서가 아니라 사회와의 계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은 환자와 의료 노동자의 이해가 일치하는 곳으로서 병원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정치적 공간이다. 이 책에서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가 ‘정치’라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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