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연대본부, 지난 18일 ‘병원 노동자 설문조사 결과’ 발표…의료현장 증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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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이탈로 인한 의료대란으로 지난 1년 간 환자뿐 아니라 병원에 남은 간호사 등 의료인력의 고통이 가중됐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본부장 박경득 이하 의료연대본부)는 지난 18일 서울대병원 암병원 지하1층 서성환홀에서 전공의 집단사직 1년을 맞아 ‘의료대란 1년, 병원 현장 어떻게 변했다’를 주제로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병원노동자 실태 조사 결과 발표 ▲전국 국립대 및 사립대 병원 노동자의 생생한 실태 증언 ▲건강과대한 이상윤 책임 연구위원 발표 순으로 진행됐다.
박경득 본부장은 “의료대란의 해법은 전공의가 빠진 자리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에서 끝나지 않는다”며 “의료가 상품이 돼 버린 한국 의료의 문제를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야 말로 광장에서 외치는 ‘사회대개혁’이고 일상에서 소망하는 안전한 삶”이라며 “올해 의료연대 본부는 모든 시민이 건강하게 살기 위한 요구를 걸고 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병원, 일방적으로 의사 업무 간호사에 전가
의료연대본부와 시민건강연구소는 지난해 12월 한달 간 의사와 관리직을 제외한 국립대와 사립대 병원 노동자 848명을 대상으로 병원 노동자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직군별로 보면 ▲간호사 480명(56.6%) ▲보건직 158명(18.6%) ▲환경 유지직 48명(5.4%) ▲지원직(보조업무) 87명(10.3%) 등이다.
분석자료에 따르면 전공의 이탈 후 병원은 ‘비상경영체제 선언 및 가동’을 전략으로, 병원노동자들에게 위기경영이란 명목으로 근무조별 인원 축소, 무급 휴가, 초과근무 확대 등 병원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의 30.8%가 무급휴가를 사용했는데, 그 이유가 전공의 이탈로 인한 과중한 업무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동료의 무급휴가 사용으로 인해 ▲근무조별 인원 간소로 인한 업무과중(79.2%) ▲급여 감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45.5%) ▲무급휴가 사용 관련해 눈치 주기(22.1%) ▲무급휴가 거절 시 인사상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18.8%) 등, 말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또 간호사들은 전공의 이탈 전부터 의사업무를 전가 받아 고강도 노동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간호사 402명 중 43.8%가 전공의 이탈 전부터 의사업무인 복합드레싱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전공의 이탈 후에는 이 비중이 47.5%로 늘었다.
의사 ID를 이용한 대리 처방이 ‘증가함’ 또는 ‘매우 증가함’으로 응답한 간호사는 44.9%였으며, 간호사 업무범위를 벗어난 추가 업무수행이 ‘증가함’ 또는 ‘매우 증가함’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70%에 달했다. 이에 따라 전담 간호사 61.6%는 역할 관련 어려움을 호소했으며, 79.1%는 업무 책임 소재 불분명으로 인한 불안감을 겪는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대병원 권지은 씨는 “병원은 적자라며 지난해 4월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직원들을 무급휴가 보내고 병동을 폐쇄하고 정부지침대로 병사 수까지 줄였다”며 “병원장은 전공의를 설득한다면서도, 의사들의 부재를 ‘시범사업팀, 진료지원 간호사’란 이름으로 의사업무를 간호사에게 전가했다. 인턴이 하던 남자 소변줄 삽입을 시작으로, 환자 동의서 받기, 중심정맥관 제거 업무, 이제는 오더 넣는 것까지 하도록 강제하면서 어느새 간호사들끼리 오더를 내고 처치를 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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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병원은 비상경영체제하에서 비민주적 운영을 강행하고 있었다. 응답자의 45.1%가 업무 조정 과정을 비민주적이라고 평가했으며, 진료지원 업무 전담 간호사의 42.9%는 진료지원 업무를 ‘일방적 통보’로 맡게 됐다고 응답했다.
업무조정과 관련해 일방적인 통보형태의 업무조정과 명확한 직무기술서 부재를 비판하는 응답자들이 많았다. 업무조정 결과 역시 투명하게 공유되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40.2%에 달했다.
이로 인해 병원 노동자들의 심신 건강도 악화된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의 38.1%는 전공의 집단 이탈 이후 새로운 건강 문제가 발생하거나 악화됐다고 밝혔다. 주요 건강 문제로는 ▲근골격계 질환(23.0%) ▲수면장애(22.2%) ▲위장관질환(11.2%) 등이었다.
울산대병원 안지홍 씨는 “간호사들은 의사업무를 수행하며 의료공백을 메웠는데, 울산대병원은 지난해 8월까지 국가지원금을 포함해 142억 원의 흑자를 내고도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며 “업무는 과중해졌지만, 실질임금은 감소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업무 배치 시 교육도 부족…환자 안전 우려
전공의 이탈과 노동권 침해로 환자 안전 역시 불안해졌다는 게 조사결과 드러났다. 응답자의 32.4%는 환자 안전사고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환자 안전사고 증가 원인으로 ▲충분한 교육 없이 전공의 업무를 타 직종에게 전가(59.8%) ▲구두처방 증가(34.1%) ▲담당 교수에게 환자 상태를 직접 의사소통하는 것의 어려움(30.3%) 등을 꼽았다. 이외에도 환자 상태나 치료계획에 대한 설명 부족,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한 비급여 항목 처방 증가, 처치 지연으로 재원 일수 증가 등이 보고됐다.
이는 전담간호사가 진료지원 업무 배치 시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조사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담 간호사가 진료지원 업무 배치 전 받은 이론교육의 중앙값은 8시간, 술기교육의 중앙값은 1시간이었다. 특히 배치 전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고 응답한 간호사의 비율은 이론교육의 경우 35.9%, 술기 교육의 경우 47.7%에 달했다.
제주대병원 신동훈 씨는 “지난 1월 임신 29주차 임산부가 조산위험으로 응급실을 찾았으나, 병상부족으로 헬기를 이용해 긴급 전원했다”고 밝혔으며, 충북대병원 이가현 씨도 “충북대병원 응급실은 ‘정상운영’되고 있다고 보도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라며 “병상 수가 30개에서 22개로 줄면서, 지난해 2~7월 사이 충북지역 초과사망은 3,316명이 발생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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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주의적 의료정책부터 민주적으로 바꿔야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이상윤 책임 연구위원은 ‘한국 의료 시스템의 위기와 개혁방향’이란 제목으로 전문가 발언에 나섰다.
이상윤 연구위원은 이번 의료대란이 단순히 전공의 집단 이탈로 인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시장중심적인 한국의 의료시스템과 정책, 노동 환경 악화,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병원 운영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사태에서도 병원은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기존 의료진의 노동강도를 증가시키고, 의료행위를 간호사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며 “이는 의료노동자들의 피로를 가중시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이 연구위원은 “보건의료 문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로, 정부는 경제 불황 시 긴축정책을 펴며 의료시스템을 축소시키는데 이는 단기적으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민 건강 악화로 인한 의료비 증가를 초래해 오히려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킨다”면서 “보건의료 정채 결정 과정을 일부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이 독점한 것도, 의료민영화와 시장 중심의 관료주의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료 노동환경 개선 ▲공공의료 확대 ▲병원 조직문화 개혁 ▲민주적 정책 결정 구조 확립 등의 방식으로 의료 노동자와 시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의료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