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세쪽 읽고 충격"…다석의 깨달음 일기, 20년 만에 풀다

2025-03-13

다석 유영모(1890~1981). 아침 한 끼는 하느님에게 드리고, 점심 한 끼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저녁 한 끼만 자신을 위해 먹었던 사람. 그래서 호도 ‘다석(多夕)’이다. 그는 40년간 일일일식(一日一食)하며 영성의 가르침을 남겼다. 씨알 사상의 함석헌과 김흥호 목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다석학회 회장인 정양모(90) 신부가 최근 『다석일지』(총 3권, 도서출판 길)를 출간했다. 무려 20년에 걸친 대작업이었다. 10일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정 신부를 만났다. 그에게 ‘다석’을 물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을 언제 처음 알았나.

“34년 전이었다. 유달영(1911~2004) 선생이 세운 서울 여의도의 성천문화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동양고전 6개, 서양고전 6개를 강의한다고 했다. 11개 분야는 선생을 다 찾았는데 ‘성경 강의’만 못 찾았다고. 그걸 좀 맡아달라고 했다.”

성천유달영은 박정희 대통령과 손잡고농촌개혁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였고, 새마을운동 초대 회장이었다. 유달영 선생은 “농촌 문제만 가지고 국민정신을 개혁하는 건 한계가 있다. 동서양 고전 12개를 두고두고 가르치자. 서양 고전의 으뜸은 성경이니 최고의 선생을 찾자”고 했다.

쉽지 않았다. 개신교 목사든, 천주교 신부든 다들 자기 종교만 최고라고 했다. 유달영은 친구인 구상 시인에게 부탁했다. 구 시인이 “몰상식한 이야기는 안 할 거다”며 정양모 신부를 추천했다. 정 신부는 프랑스 리옹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성서의 배경인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성서연구소에서 현장답사까지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성서 신학의 최고봉’이다.

“하루는 강의를 마치고 유달영 선생의 서재에 갔다. 책꽂이에 꽂힌 책 중에서 낯선 이름이 보였다. 다석 유영모. 누구냐고 물었다. ‘말로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집에 가서 보라’며 복사본 책을 몇 권 주시더라.”

복사본 책을 받을 때, 기대가 있었나.

“아니다. 전혀 모르는 분이니까. 괜히 짐만 된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주시니까 예의상 받기는 했다. 그날 저녁에 그 책을 읽어 봤다. 세 페이지째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어떤 충격이었나.

“아, 정말 독창적인 분이구나. 선생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책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스스로 공부해서 독자적인 인생관을 개척하신 분이구나. 신관, 예수관, 인생관(인간관)을 스스로 터득하신 분이구나. 정말 굉장한 스승이다. 그때부터 저는 다석 공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유달영 선생은 다석 유영모의 직제자였다. 다석의 글을 성경만큼 받드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최고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정 신부가 충격을 받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유럽에서 꼬박 10년간 공부하며 늘 아쉬웠다. 그건 서양 사람들 구미에 맞는 공부였다. 그들의 연구 방법론과 연구 실적은 서구적이었다. 공자나 부처님 등, 소위 동방의 사상가들을 거론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늘 동양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유럽에서 많은 걸 배우지 않았나.

“서양의 업적은 대단하다. 많은 걸 배웠지만 내 것이 아니더라. 우리 것을 그리워했는데, 그런 분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런 기대도 없이 복사본 책을 읽다가 나는 무릎을 쳤다. 아, 내가 그리던 동양의 스승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정 신부는 그날 밤을 새워 받은 책을 모두 독파했다.

다석유명모는 기독교 성경은 물론이고 불교와 노장(老莊), 공맹(孔孟)을 두루 뚫어낸 인물이다. 다석이 남긴 글 중에서 정수로 꼽히는 게 ‘다석 일지’다. 1955년부터 74년까지 20년간, 날마다 기록한 깨달음의 일기다. 거기에는 다석이 관통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 대한 안목과 이치가 독창적인 번득임으로 서술돼 있다.

문제는 읽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아래 아(ㆍ)를 사용하는 등 옛 한글 표기와 다석이 만든 순우리말 등이 뒤섞여 읽기가 여간 난해한 게 아니다. 정양모 신부는 2005년 다석학회를 조직해 20여 명의 회원과 함께 ‘다석 일지’를 요즘 말로 쉽게 풀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원고 분량만 6500매(200자 원고지)가 넘었다. 시작부터 올해 3월 출간까지 무려 20년이 걸렸다. 그야말로 대장정(大長征)이었다.

20년에 걸친 엄청난 작업이었다. 소회가 어떤가.

“후련하다. 인도하면 석가, 중국 하면 공자와 맹자가 딱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물으면 뭐라고 답하겠나. 우리 겨레는 다석이란 굉장한 사상가가 있다. 그걸 몰라주더라. 국방 하면 이순신을 내세우는 것처럼, 문화는 다석이라고 본다.”

지난 20년간 다석학회 회장을 맡았던 정양모 신부는 『다석 일지』 1권 맨앞에다석의 생애와 사상, 두 개의 서문을 썼다. 그것만 읽어도 다석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눈에 보인다. 『다석 일지』는 다석의 원문을 맨 위에 싣고, 그다음에 시처럼 풀어서 윤문을 싣고, 그 아래 다시 요즘 말로 풀이를 달았다. 징검다리가 원문을 포함해 세 개나 된다. 그래서 난공불락이던 다석의 글들이 수월하게 가슴 안으로 쑥쑥 들어온다.

“다석을 쉽고, 분명하고,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애를 썼다”는 정 신부의 다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실감한다. 다석의 영성이 어느새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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