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향 가득 정겨운 ‘사랑방’ 마음까지 따뜻해요…목욕도시 ‘부산’

2025-04-20

“대인 둘, 소인 둘이요!”

주말 아침, 부모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남녀유별’의 공간. 속옷만 걸친 어른들이 화투를 치거나 바둑을 두고, 습한 공기 속엔 비누향이 가득하다. 까슬한 때수건으로 낯선 이의 등을 밀어주기도 하는 이곳. 바로 동네 목욕탕이다. 어릴 적 동네를 걷다보면 높게 솟은 목욕탕 굴뚝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연기는커녕 굴뚝조차 보기 힘들다. 동네 목욕탕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궁금증을 안고 역사 깊은 ‘목욕의 도시’ 부산을 찾았다.

이번 취재의 길라잡이는 목지수 ‘싸이트브랜딩’ 대표다. 그는 ‘집앞목욕탕’ 잡지를 9호나 펴낼 정도로 목욕탕에 진심이다. 목 대표는 “2023년 기준 부산에 등록된 목욕탕은 약 730곳으로, 690여곳인 서울보다 많다”고 귀띔했다. 참고로 부산 인구는 서울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다.

부산과 목욕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시작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재상인 충원공이 온천수가 솟던 동래에서 목욕을 즐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개항 후엔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동래온천’을 개발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부산에서 대중목욕탕은 중요한 시설이었다. 피란민이 임시로 지은 판잣집에 욕실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 또한 섬유·신발 산업 등 먼지가 많이 날리는 업종이 발달해 퇴근길에 몸을 씻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도 했다.

부산은 다양한 목욕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1954년 국내 최초로 대중목욕탕 인허가를 받은 ‘금정탕’이 동래구에 있었고, ‘이태리타월’로 알려진 때수건도 부산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한 직물공장 사장이 들여온 이 수건은 전국으로 퍼지며 한국 고유의 세신문화를 만들어냈다. 목 대표는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때를 미는 문화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며 “특히 경남과 부산엔 등밀이 기계까지 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목 대표를 따라 목욕탕 굴뚝을 보러 중구 영주동 마을 전망대에 올랐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다본 산복도로엔 집들만 가득했고, 높고 커다란 굴뚝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예전에 산 위에서 보면 목욕탕 굴뚝이 마치 성냥갑 속 성냥개비같이 빼곡했어요. 이제 부산에서도 목욕탕은 많이 사라졌고 남은 굴뚝도 대부분 폐굴뚝이에요.”

2008년부터 부산을 비롯해 전국 목욕탕을 기록해온 목 대표는 점점 줄어드는 굴뚝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사라져가는 공간을 기억하기 위해 2023년부터 ‘집앞목욕탕’ 잡지에 목욕탕들을 한곳씩 담아왔다. 그중 한곳이 1986년 문을 연 영도구 봉래동 ‘봉래탕’이다. 이곳의 대표 이영훈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초창기엔 하루 매출이 평균 30만원에 달했다”며 “당시 대기업 직원 한달 급여와 맞먹는 수준이었으니 그야말로 ‘때돈’ 번 거”라고 회상했다.

지금은 손님 대부분이 장년층이다. 목 대표는 젊은 세대도 함께 목욕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23년 이 대표와 함께 봉래탕에서 팝업스토어 ‘몰래탕’을 연 것. 영업이 끝난 목욕탕을 놀이 공간으로 변신시켜 목욕문화를 가볍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목 대표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꼬마 손님이 “진짜 목욕탕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며 당시의 감동을 전했다.

목욕탕은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한다. 목 대표는 목욕탕을 동네 사랑방에 비유한다. ‘달목욕’이라고 불리는 정기 이용자들은 샤워 시설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위안을 얻고자 목욕탕을 찾는다. 그는 “매일 씻으러 오던 어르신이 안 보이자, 목욕탕 사장이 집에 직접 찾아가 병원으로 모시기도 했다”며 일화를 전했다. 이밖에 겨울철 수도관이 얼었을 때나 재해로 집을 잃은 이들에게도 목욕탕은 여전히 필요하다.

“제가 좋아하는 건 습식 사우나입니다. 먼저 땀을 빼며 몸을 풀고, 마무리는 냉탕에서 합니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죠.”

이번 주말, 뜨끈한 탕에서 불린 때를 개운하게 벗겨내고, 시원한 음료 한잔 마시며 하루를 시작해보자. 이것이야말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부산=조은별, 사진=강재훈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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