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아함과 편안함, 사치를 위해…나는 얼음을 먹고 프랑스 와인을 마시며, 비천한 경제를 초월할 거야.”
19세기 초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은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당시 영국 상류층 저택에는 겨울에 취한 얼음을 보관해둘 수 있는 지하 창고가 있었다. 벼락부자 사촌오빠의 집에서 누리던 짧은 호사였다. 당시 ‘얼음’은 상류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사치였지만 기술의 진보는 이 특권을 모든 집의 흔한 풍경으로 바꿔놓았다. 그 거대한 변화의 역사를 세밀하게 따라가는 책이 ‘냉장의 세계(Frostbite)’다.
미국 잡지 ‘뉴요커’의 필자이자 음식·과학 팟캐스트 ‘가스트파드’의 진행자인 니콜라 트윌리는 오랜 시간 냉장 기술과 인간 삶의 관계를 추적해왔다. 그는 이 책에서 ‘콜드체인(cold chain)’이라 불리는 냉장 유통망을 따라 농장에서 부엌까지, 과일 창고에서 냉동 창고까지 음식의 여정을 생생하게 따라간다. 저자는 현장 취재를 위해 미주리의 지하 치즈 저장소, 뉴욕의 바나나 후숙실, 미국 전역의 오렌지주스 비축액을 담은 대형 냉장 탱크 등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류가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먹기 시작한 것은 수만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음식을 차갑게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부터다. 그 이전 인류는 오랜 기간 부패와의 전쟁을 벌였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1만 2000년 전 중동 지역에서 사람들이 고기를 말려 미생물을 제거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수메르인들이 생선을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보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과일을 꿀에 절였으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김치, 장류 등의 발효 음식을 통해 미생물을 제거하기보다 유익한 미생물 성장을 유도하는 타협책을 찾기도 했다.
극적인 변화는 19세기 후반 증기 동력 제빙기가 발명되고 20세기 전기가 보편화되면서 일어났다. 이 기간 동안 인류의 식문화는 물론 세계 경제, 도시 구조, 환경까지 극적으로 재편시켰다. 글로벌 콜드체인을 따라 농산물과 축산물의 유통 방식이 바뀌었고 항구와 물류망이 재설계됐다.
영국 왕립학회는 냉장고를 “인류 식생활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꼽았다. 냉장 보관이 불가능했던 과거 인류는 거의 항상 영양 결핍에 시달렸고 반면 농산물 수확기에는 일시적인 과잉 공급으로 썩어버린 음식을 버려야 했다. 냉장 기술은 이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 음식 보존 기간이 늘어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신선하고 영양가 있으며 저렴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이는 곧 평균 신장의 증가와 건강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농경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인류는 수백 가지 신선 식품 중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해 먹을 수 있게 됐고 부패뿐 아니라 계절과 지리의 제약도 함께 극복하게 됐다.
저자는 인공 냉장 기술이 육류와 농산물의 생산 방식까지 재설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통찰을 제시한다. 예컨대 콜드체인에 맞춰 축산 방식과 도축 위치를 재배치했다. “우리는 인간의 수명보다 사과의 유통기한을 늘리는 데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정도”로 수많은 엔지니어, 교수, 기술자, 운송업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전 세계에 펼쳐져 끊임없이 흐르는 핏줄과 같은 콜드체인을 타고 필리핀산 아보카도, 뉴질랜드산 소고기, 프랑스산 치즈가 한국 가정의 냉장고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4분의 3 이상은 콜드체인 없이는 식탁에 오를 수 없다.
하지만 트윌리는 냉장이 만들어낸 풍요의 그늘에도 주목한다. 과일과 채소의 맛은 떨어졌고 영양은 줄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냉장 창고 면적이 가장 넓은 나라지만 식이성 질병 비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무엇보다 에너지 소비 측면에서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 책은 방대한 현장 취재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냉장 기술이 바꾼 인류사를 흥미롭게 기술한다. 또 한가지 미덕은 독자들에게 판단을 강요하는 않는 점이다. 다만 다 읽었을 때 독자 스스로 자신의 식탁과 냉장고의 음식들의 원천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가진 책이다. 484쪽, 2만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