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이 미국·중국·러시아 등 초강대국들의 치열한 패권 다툼이 벌어지는 '새로운 전장(戰場)'이 될 수 있단 전망이 나오고 있다. 북극에 인접한 그린란드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 동원까지 시사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야욕이 러시아와 중국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자극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트럼프 집권 2기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된 마이크 월츠 하원의원은 지난 12일(현지시간) ABC뉴스에 "트럼프 당선인은 북극과 서반구에서 우리가 직면한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당선인은 어떤 (군사적) 옵션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7일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미국 영토로 삼기 위해 군사력 투입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한 발언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 등은 "북극을 향한 트럼프의 집착이 러시아와 중국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북극에 군사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측 "적들 침투" VS 러 "북극, 중요지역"
트럼프가 이처럼 '북극 패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북극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다.
트럼프 측도 이런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월츠는 이날 "북극에 60척의 쇄빙선이 있는 러시아를 볼 때, 북극 얼음이 녹으면서 중요한 광물·석유·천연가스가 드러나고 새로운 항로가 열리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적들이 서반구에 침투해 국가 안보를 위협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어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이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크고 대담한 조치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당장 미국에 견제구를 날렸다. 지난 8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북극은 우리의 국익과 전략적 이익이 걸린 지역"이라고 받아쳤다.
북극은 원래 얼음으로 뒤덮인 황무지였지만,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위상이 달라졌다. 천연자원의 보고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고 있다. 미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북극 일대엔 석유 약 900억 배럴(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15%)과 천연가스 47조㎥(전 세계 매장량의 30%)가 매장돼 있다. 반도체·전기차 등 제조에 필수적인 희토류도 가득하다.
또 북극 항로는 아시아와 북미, 유럽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 '얼음 위의 실크로드'로 불린다. 예를 들어, 서유럽에서 동아시아로 가는 해상 운송의 경우 북극해를 통과하면 홍해의 수에즈 운하로 갈 때보다 경로가 약 40% 단축된다고 한다.
러, 북극 군사기지 50곳…중·러 합동순찰도
미·중·러는 이러한 막대한 경제적·지리적 이점에 주목해 북극에 공을 들여왔다. 이들 국가 중 현재 '북극 패권 경쟁'에서 가장 앞서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북극 해안선(전체 북극 해안선의 약 53%)을 가진 러시아다.
러시아는 북극 지역에서 해군 기지, 미사일 발사대, 비행장을 포함한 군사 기지 50곳을 운영하는 등 광범위한 군사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또 북극 바다의 얼음을 깨고 항해할 수 있는 쇄빙선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13년 북극과 인접한 아이슬란드에 연구소를 세우고 북극의 환경과 기후 변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같은 해엔 한국·일본 등과 함께 '북극 이사회'의 정식 옵서버가 됐다. 북극 이사회는 북극에 인접한 노르웨이·덴마크·러시아·미국·스웨덴·아이슬란드·캐나다·핀란드가 회원국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 2023년 7월 북극해 상공에서 합동 순찰을 벌였는데, 이를 두고 북극에서 양국이 군사적 존재감을 높이려는 의도란 해석이 나왔다. 미국은 1951년부터 그린란드 서부에 '피투피크 우주군 기지'란 공군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그린란드에 미군 증강, 러는 스발바르 '눈독' 가능성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그린란드 점령 의사를 밝히면서 북극에서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초강대국들의 경쟁이 더욱 불붙을 전망이다.
벌써부터 그린란드엔 미군이 증강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지난 11일 미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덴마크는 최근 트럼프 측에 그린란드에 주둔하는 미군을 증강하는 방안을 논의할 의사가 있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매체는 "덴마크가 그린란드를 미국에 넘겨주지 않고도 트럼프의 안보 우려를 이렇게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그린란드 점령을 원하는 트럼프가 이 조치만으로 만족할진 미지수다.
또 폴리티코는 "그린란드에 대한 트럼프의 야욕에 자극받은 러시아가 그린란드에 인접한 스발바르 제도에 눈독을 들일 수 있다"고 짚었다. 노르웨이와 북극점의 중간에 있는 스발바르 제도는 노르웨이 영토이지만, 1920년 체결된 스발바르 조약에 서명한 러시아·미국 등도 이 지역에서 경제 활동이 가능하다. 스발바르 제도는 러시아 북방 함대가 대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해로를 따라 있어 모스크바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토레 비그 오슬로대 정치학 교수는 폴리티코에 "미국이 그린란드 점령 등에 나선다면 모든 게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