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보다 중요한 건 ‘광장 민주주의’를 ‘일터 민주주의’로 만드는 것”④

2025-01-05

“윤석열 탄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HD현대(옛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 HD현대건설기계 하청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변주현씨(30)는 지난달 14일 탄핵소추안 가결을 앞두고 국회 앞에서 열린 사전집회 중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변씨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변씨는 2016년 스물두 살 때 조선소에 처음 발을 들였다. 특수선에서 케이블 작업을 했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고 일은 일대로 힘들어 2년 반 만에 하청업체를 그만뒀다. 이후 변씨는 용접공 임금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원에서 용접을 배운 뒤 2019년 2월 HD현대건설기계 하청업체 서진이엔지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당시 현장직 중 유일한 여성 노동자였다.

변씨는 입사한 지 1년 반 만인 2020년 8월 일자리를 잃었다. 회사가 갑작스럽게 폐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서진이엔지 해고 노동자들은 폐업 철회, 고용 승계 등을 요구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해 2월엔 원청인 HD현대건설기계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승소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만에 원청의 불법파견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원청이 1심 판결에 불복해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노동자들은 이미 비상계엄이었다”

변씨는 5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계엄 시국이었다”고 말했다. 그에겐 고용노동부·1심 법원이 잇달아 불법파견을 인정했는데도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원청의 모습과 야당 탓을 하며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포개져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가 지난해 11월13일 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 내에서 농성을 시작하자 한화오션 원청 노동자 중 일부가 하청노동자를 ‘하퀴벌레(하청+바퀴벌레)’로 부르며 비난했다. 변씨는 “가장 낮은 곳에서 열악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돌아오는 건 깔보는 시선”이라고 말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비정규직을 ‘사회적 신분’으로 고착화시킨 것이다.

다만 변씨는 이번 탄핵 정국에서 “약자가 약자를 돕는 연대”가 싹트는 모습에서 희망의 씨앗을 봤다. “복직 투쟁을 하면서 사실 외로웠다. 목소리를 내도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2030 여성들이 농민·장애인과 연대하는 걸 보고 눈물이 났다.” 2030 여성·성소수자들의 연대는 1년가량 고공농성 중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한화오션 하청노동자 등에 대한 후원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시민들이 ‘여기’까지 와준 만큼 이젠 노동운동이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 특수고용직·플랫폼 종사자의 노동자성 인정 등 우리의 요구안을 구체화하고 관철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변씨에게 윤 대통령 탄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광장의 민주주의’를 ‘일터의 민주주의’로 이어가는 것이다. 탄핵 정국이 마무리되더라도 광장의 에너지가 흩어져버리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변씨는 “일하는 현장에서 느낀 부당함과 싸우기 위해 노조에 가입하고 일터에서도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워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상적인 헌법정지 상태’ 겪는 이주노동자

지난달 3일 비상계엄 선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또 다른 이들은 이주노동자였다. 스리랑카 출신인 차민다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 부지회장은 “한국 사람들도 계엄으로 두려움을 느꼈는데 자신의 권리를 지킬 방법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더 겁에 질리고 무서워했다”고 말했다. 특히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강제추방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움츠러들었다.

이주노동자들의 두려움은 코로나19 대유행 당시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경우 공적 마스크를 살 수 없거나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사업주의 부당한 지시를 받아야 했다. 비상한 시국일수록 사회적 약자가 차별받는 경험을 한 것이다.

차민다 부지회장은 지난달 14·28일 대구에서 열린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이주노동자 조합원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국 사람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도 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튼튼해야 약자인 이주노동자의 노동인권도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계엄 이전에도 이주노동자 노동인권은 늘 사각지대에 있었다. 특히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를 사용자와 국가를 위한 도구로 삼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차민다 부지회장은 “이주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코리안 드림을 갖고 한국에 오지만 3D 일자리로 내몰린다”며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노예’처럼 일하거나 안정적 체류자격을 포기하고 미등록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여기서 일하다가는 병이 들거나 죽을 것 같아 다른 사업장으로 옮기는 일이 20년간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에게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며 “일시적인 헌법 정지 상태에 분노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건 이주노동자의 일상적인 헌법 정지 상태”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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