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도시가 빨간색…베이징에서 본 ‘인류무형유산’ 중국 춘절

2025-01-29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 후 첫 춘절

“가족이 모이는 날” 도시 곳곳 축제

추시·춘절 풍습 자연스럽게 전승

한국의 설, 베트남의 뗏, 중국의 춘절… 세계 인류의 5분의 1은 설 명절을 지낸다.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중국의 춘절이다.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 간 위원회(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춘절(영어명 스프링 페스티벌)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한 달간 이어지는 중국 춘절 문화가 독특한 특색이 있으며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감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이어진다고 봤다.

한국과 다르지만 비슷한 중국 춘절 문화를 들여다봤다.

음력 섣달그믐인 28일 베이징 시내 아파트와 상점 여러 곳의 현관문에 붉은색 종이띠 한 쌍이 부착됐다. 종이띠에는 새해 모든 일이 순조롭고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는 글귀를 적어넣는데 춘련이라고 부른다. 춘련은 설날 하루 전날 붙인다. 베이징 주택가 상점들은 이날 춘롄을 걸어둔 채 문을 닫은 경우가 많았다. 이미 귀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중국의 올해 공식 춘절 연휴는 28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8일간이다. 하지만 연휴는 보름 전부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당국은 지난 14일부터 다음 달 22일까지를 춘절 특별운송기간으로 선포했다. 가로수, 놀이터 등에는 춘절 약 한 달 전부터 붉은 등이 걸렸다. 옷 가게에서도 춘절 특별상품으로 빨간색 옷을 더 많이 매대에 내놓는다. 한 달 동안 내내 도시가 빨간색 소품으로 가득 찬다.

중국 교통운수 당국은 해마다 춘절기간 연인원(중복 포함 개념) 90억명이 이동할 것으로 예상한다. 귀향과 여행 수요가 겹치면서 유명 관광지 입장권과 호텔, 비행기표 가격이 치솟고, 철도 예매 경쟁도 치열해진다. 베이징의 피트니스클럽에서 일하는 윈난성 출신 리모씨는 “17일부터 쉬는데 먼저 스키장에 여행을 갔다가 춘절에 임박해 고향에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춘절대이동의 배경 중 하나는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농촌 출신으로 도시에서 일하는 농민공 규모는 3억명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산시성 출신 상인 장캉(38)은 “평소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춘절 기간에는 모여서 함께 먹고 마신다”며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이 춘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말했다. 축제 분위기는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진다.

다만 가족끼리 모여 결혼, 취업 문제로 스트레스를 준다는 부작용도 있다. 산둥성 출신인 베이징의 한 30대 여성은 “명절에 고향 가면 결혼은 왜 안 하냐 소리하는 것은 한국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춘절을 며칠 앞두고 중국 포털 바이두에서는 ‘춘절에 고향에 갔더니 느닷없이 부모가 맞선을 보라고 했고, 맞선 상대와 결혼했다’는 글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많은 블로거들이 한 누리꾼의 에피소드를 미담처럼 전했지만, 중국 청년들이 겪는 압박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베이징 한복판 후통(옛 골목)과 가까운 둥청구 주민 저우리샤의 가족도 28일에 모두 모였다. 섣달그믐은 추시라고 불리는데 가족과 함께 하는 중요한 날이다. 저우씨는 가족들과 함께 집 대청소를 하고, 현관문에 춘롄을 붙이고, 집에서 성대하게 상을 차려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저우씨 가족은 저녁식사 후 아파트 단지 한켠에서 종이지폐를 태우는 의식을 했다. 돌아가신 조상들이 저승에서 쓸 노잣돈을 보내는 의식이다. 저우씨는 행운을 상징하는 빨간색 니트에 빨간색 패딩코트를 입고 나와 의식을 진행했다. 그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다 챙긴다”며 “돌아가신 분들이 평안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이를 통해 지금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도 빈다”고 말했다.

저우씨 가족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 벽 곳곳에 ‘안전과 환경보호를 위해 춘절 불꽃놀이를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중국 당국은 종이돈 태우기 의식도 ‘봉건 미신’이라고 규정하며 곱게 보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동네 곳곳에서 조용하게 종이돈을 태우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춘절을 등재한 이유로 춘절이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고 지역사회를 끈끈하게 뭉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춘롄, 붉은 등, 가족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먹는 전통, 사자춤 등 민속공연 모두 무형유산에 포함한다고 밝혔다. 이런 유산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세대 간 유대가 강화되고 지역 공동체가 뭉치며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중국 관영매체 역시 인류무형유산 등재 소식을 전하며 중국의 아름다운 전통을 강조했다.

다만 민간의 일상에서 ‘아름다운 전통’과 ‘봉건 미신’의 경계는 모호했다. 저우씨는 종이돈 태우기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전통이라고 전했다.

드론이 대체 못하는 불꽃놀이 아쉬움

전통과 당국의 규정 사이 가장 큰 괴리를 보이는 것은 불꽃놀이다. 추시에서 춘절로 넘어가는 밤 베이징에서 불꽃은 볼 수 없었다. 간간이 폭음은 들렸다. 무연 폭죽을 터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불꽃놀이는 중국 춘절 문화의 하이라이트였지만 당국의 엄격한 금지로 현재는 도시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 됐다. 소음, 미세먼지, 안전사고 등 문제도 많았다.

추시 불꽃놀이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 시달리던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괴물을 물리쳤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전설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밤새 냄비 등을 두들기며 괴물을 깨우자 추시라는 이름의 무사가 활을 쏘아 괴물을 처치했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불꽃놀이가 시작됐다고 한다. 가족 행사가 공동체의 행사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에 불꽃놀이가 있는 것이다.

베이징 시내에서 100km 가량 떨어진 고북수진 등 관광지에서는 드론 조명쇼가 열린다. 당국은 첨단기술이 동원된 드론조명쇼가 ‘불꽃놀이를 현대적이고 문명화된 형태’로 대체했다고 홍보한다.

장씨는 “드론조명쇼도 멋지지만 불꽃놀이를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수천년 동안 해왔던 것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쉽다”고 전했다. 화약이 송나라 때 발명된 사실을 생각하면 불꽃놀이가 ‘수천 년’ 이어진 전통은 아니겠지만 장씨의 말에서 옛것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29일 춘절 당일이 되자 모바일 메신저가 새해 인사 메시지로 가득 찼다. 많은 중국인에게 새해 첫날은 ‘음력 1월 1일’이었다.

본격적 춘절 행사는 이날부터 시작한다. 도심 광장과 공원, 사원에서는 ‘묘회’가 열린다. 탕후루, 솜사탕, 양꼬치, 떡 등 길거리 음식 노점과 전통 공예 노점들이 출동한다. 원반던지기, 사격 등 게임을 하고 경품을 타갈 수 있는 부스도 있다. 사자춤 등의 공연도 열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첫 춘절이지만 등재 사실이 특별히 강조되지는 않았다. 중국인들이 늘 사랑해오던 전통을 올해도 잇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베이징 전통풍 번화가 치엔먼다지에 묘회에서 공예 부스에 참여한 장씨는 “최근 몇년 간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올해는 다들 나아지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저우씨 역시 “온 가족이 모일 수 있어서 좋은 날”이라며 “모두가 춘절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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