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붉은광장에 설까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4-17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들이 기리는 두 가지 날이 있다. 군국주의 일본의 항복이 계기가 된 ‘일본을 상대로 한 승전’ 기념일(V-J 데이)과 나치 독일의 항복에 따른 ‘유럽에서의 승전’ 기념일(V-E 데이)이 그것이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에선 1945년 8월15일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한 점에 착안해 8월15일을 V-J 데이로 여긴다. 우리에겐 바로 광복절이다. 반면 대일 전승을 주도한 미국은 1945년 9월2일 일본 정부 대표가 도쿄 앞바다에 정박한 미 해군 전함에 승선해 고개를 숙인 채 정식 항복 문서에 서명한 점을 들어 9월2일을 V-J 데이로 간주한다.

군국주의 일본의 항복에 앞서 약 3개월 전인 1945년 5월8일 나치 독일이 미국, 영국, 소련(현 러시아), 자유 프랑스 등 연합국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5월8일을 V-E 데이로 기린다. 반면 러시아는 하루 뒤인 5월9일이 V-E 데이, 즉 전승절이다. 애초 독일 대표는 프랑스 땅에 있던 연합군 사령부에서 소련군 장교도 참관한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했는데, 뒤늦게 이를 안 스탈린이 격분하며 소련군 점령 하의 베를린에서 다시 서명식을 하도록 해 그만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옛 소련 연방 구성국을 비롯해 친(親)러시아 국가들도 5월9일을 대독 전승절로 기념한다.

오는 5월9일은 러시아의 80주년 전승절이다. 매년 이날이면 모스크바 크레믈궁 앞 붉은광장에서 2차대전 승전을 축하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열렸다. 올해는 2차대전 종전 80주년인 만큼 예년보다 훨씬 더 성대하게 치러질 전망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 여러 나라 정상에게 초청장을 뿌렸다. 앞서 유럽연합(EU)은 27개 회원국은 물론 가입 협상이 진행 중인 후보국들에게 러시아 전승절 행사 보이콧을 주문했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에게 고강도 경제 제재를 부과한 EU로선 당연한 조치일 것이다. 하지만 동유럽의 대표적 친러 국가인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은 “EU 가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경고에도 열병식 참석을 강행할 태세여서 EU와의 마찰이 불가피해 보인다.

북한 김정일 국무위원장도 푸틴의 초청장을 받아든 상태다. 2024년 6월 푸틴이 평양을 방문한 만큼 이번에는 김정은이 모스크바에 갈 차례이기도 하다. 더욱이 북한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를 돕기 위해 1만4000명가량의 병력을 보내 사실상 동맹이나 다름없다. 김정은이 전승절 열병식에 맞춰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김정은에겐 모스크바까지 직항이 가능한 전용기가 없다. 북한 지도자가 양자회담도 아니고 정상급 인사 여럿이 모이는 국제 행사에 얼굴을 내민 전례 또한 찾기 힘들다. 요즘 북한과 거리를 두는 중국의 시진핑 역시 김정은과의 대면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20여일 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에 과연 김정은이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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