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위기, 인구감소, 수입농산물 급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농업은 더 이상 전통산업이 아닌 국가 생존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하지만 대응의 핵심 축인 연구개발(R&D) 투자는 여전히 미미하다. 내년도 농림축산식품부 예산은 20조350억원, 그중 R&D는 2612억원으로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지금의 구조로는 '기술농업', '데이터농업'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
농업의 디지털 전환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기술의 생태계가 없기 때문이다. 국정감사에서도 '농진청의 R&D 예산 확대'가 반복해서 언급됐다. 국감장에서는 인공지능(AI) 기반 농업 로봇, 위성농업, 기후적응 품종개발, 정밀재배 같은 핵심 프로젝트가 여전히 시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농진청의 본연의 기능은 연구개발인데, 예산 구조상 농업보조와 직불제에 밀려 있다는 지적이다.
농촌진흥청의 예산은 내년 1조1325억원이다. 이 중 R&D는 6238억원으로 올해보다 10% 늘었다 . 방향은 맞지만 규모는 여전히 작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연구는 늘고 있지만 '산업화 단계'로 이어질 투자는 충분치 않다.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 전체 R&D 예산은 올해 29조6000억원에서 내년 35조3000억원으로 사상 최대폭으로 늘었지만 농업 R&D는 그 흐름을 타지 못했다. 실증과 확산의 간극이 여전하다는 의미다.
연구와 산업 사이의 골은 더 깊다. 농업기술이 연구소에서 끝나고 시장과 단절되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로봇·드론·정밀농기계·데이터·표준 등 각 기술을 담당하는 부처가 분산돼 있어 '책임의 주체'가 불분명하다. 농진청은 연구를, 산업부는 제조를, 국토부는 공간데이터를, 농식품부는 보급을 맡고 있지만 각 부처가 각자 과제를 추진하는 사이 기술의 흐름은 끊긴다. 정책이 아니라 사업으로 쪼개진 구조 속에서 연구는 흩어지고 예산은 쪼개진다.
결국 현장에는 결과가 남지 않는다. 농업인의 입장에서 보면 “R&D가 늘었다”는 말은 체감되지 않는다. 스마트팜 장비를 도입해도 유지비 부담이 크고 로봇은 고가여서 보급률이 낮다. 데이터 기반 농업은 여전히 표준화가 되지 않아 지역마다 시스템이 다르다. 실증센터는 늘고 있지만 산업화로 이어질 다음 단계가 없어서다. 기술과 산업을 잇는 구조적 사다리가 부재한 것이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예산 증액이 아니다. 우선 농식품부 내부의 예산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 지원·보조 중심의 정책판에서 R&D, 실증, 표준, 데이터 인프라 중심의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농업을 '보호'가 아니라 '투자' 대상으로 봐야 한다. 지금의 1.3%는 농업을 생존 산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구조적 한계의 숫자다.
핵심 프로젝트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로봇과 드론, AI, 바이오, 정밀농기계는 각각 다른 부처 예산에 흩어져 있다. '연구-실증-사업화'가 한 축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예산을 늘려도 성과는 분산된다. 농진청이 기술 개발과 실증을 맡고, 농식품부가 산업화를, 산업부가 기술표준과 관리하는 식의 명확한 역할 재조정이 필요하다.
농업 R&D는 식량안보, 수출경쟁력, 농촌 지속성의 기반이다. 기후적응 품종, 저탄소 축산기술, 물관리·수질관리, 자동화 로봇, 데이터 기반 정밀농업 같은 핵심 분야는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공공투자의 영역이다. 여기에 국가가 앞장서야 한다. 농업에서의 기술주권은 식량주권과 맞닿아 있다.
정부는 내년 예산에서 '성과 중심의 재정운용'을 강조했다. '성과'는 눈에 보이는 보급률만이 아니라 산업구조를 바꾸는 힘이어야 한다. 농업의 디지털 전환과 산업화를 정부가 진정으로 목표로 삼는다면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한다. 1.3%의 숫자를 바꾸지 못하면, 농업의 미래는 여전히 과거에 머무를 것이다.
박효주 기자 phj20@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