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흉내 내기 어려운 고집,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경주 한옥 펜션 ‘수오재’ 이재호 대표

2025-03-15

우연히 경주 ‘수오재’를 방문했고 예정에 없던 인터뷰를 진행했다. 고즈넉하면서도 위엄 서린 한옥들. 비닐하우스 안에 가득한 수십, 수백, 수천 년의 역사 흔적들, 그리고 차에서 식사까지 가득한 정성의 감동, 미술에서 문학을 거쳐 음악까지 혼재된 사람들과 공간에 흠뻑 취했다.

대한민국의 문화와 역사를 사랑해서 경남에서 서울로, 울산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주에 자리 잡은 수오재의 이재호 대표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연인처럼 그리워만 하며 그 자작한 슬픔을 아름답게 간직한다.

30년째 경주시민으로 살아온 그는 달빛에 그늘진 대나무를 보고 자연의 위대함을 따라잡을 수 없어 붓을 꺾었고, 고요한 슬픔이 들 때면 신체의 일부 같은 단소를 들어 눈을 감고 자기의 음악에 빠져든다. 길을 걷는 즐거움을 오롯이 자신만의 것으로 체화해 글로 게워 내기 위하여 모든 문화유적을 밟는 순간을 홀로 경험한다.

모든 순간 진지한 그를 3월의 첫 월요일에 경주에서 만났다.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다

Q. 경주 수오재에 관해 울산에서도 많이 알고 있더라. 오래된 한옥도 있고, 새로 지은 건물도 보이고. 이 공간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다 설명하려면 무척 긴데 압축해서 말해야겠지. 애초에 사업을 위해 펜션을 지었던 것은 아니고, 경주라는 장소성과 오래된 이 한옥들이 우리의 문화이기 때문에 왔다가 펜션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언제나 한국 문화를 알리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고 또 활동해 왔으니까.

사람들이 집을 구할 때 각자 사연들이 있지 않나. 난 이 집을 구할 때 첫째 조건이 영원히 개발이 안 될 곳이었다. 둘째, 내가 사는 곳 주변에 문화유적이 있어야 했다. 여기엔 왕릉들이 즐비하다. 셋째,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곳. 어릴 때부터 저녁노을을 보면 막연한 슬픔을 느꼈고, 그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영원히 개발되지 않는 곳이 어디일까? 물론 세상에 영원이란 없지만, 내가 찾은 그런 곳이 경주였고, 여기에 정착할 계획으로 지금 딱 만 30년이 됐다, 30대 나이에 이 동네로 왔다. 주위를 보면 상당히 드라마틱한 좋은 곳이다.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평생 싸우다

Q. 울산의 반구천암각화 문제에도 상당히 관심을 가졌고, 불국사 인근 개발 문제에도 관여한 것으로 들었다.

전국의 문화유산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본 인생이다. 그런 관점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이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 해왔다고 생각한다. 난개발 때문이다.

반구천암각화 같은 경우는, 한일 월드컵이 있던 때 반구대 관광을 개발했다. 아마 그 당시 국내에서 암각화 안내를 내가 제일 많이 했을 것이다. 국내 관광객을 대상으로. 반구대를 수도 없이 걸으면서 그 길의 공간이 주는 특별한 느낌을 나는 늘 새롭게 경험했다. 그래서 그 장소에 관광을 위한 개발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암각화박물관에 대형 버스 8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암각화로 향하는 길을 훼손하겠다는 걸 앞장서서 반대했다. 당시 개발 프로젝트는 천전리에서 암각화까지 구름다리를 만드는 내용이었다. 이건 아니지.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해외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돌아오고 보니 날 대표로 해놨다. 반구대사랑시민연대 대표로서 울산시와 정부와 엄청나게 싸웠고 반구대의 길을 훼손하고 천전리와 반구대의 암각화를 잇는 구름다리 만드는 걸 저지했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은 80퍼센트쯤 성공했다. 예를 들면, 당시 인근에 반구천 물고기로 민물매운탕 식당이 여덟 군데 있었는데 한 군데 빼고는 모두 철거했다. 한때 울산의 식수원이었던 반구천(대곡천)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었다. 천전리 각석 주변의 길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애를 썼고,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병영성 살리기라든지 태화루 위치 문제라든지, 어떡하든 문화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서 싸웠다.

불국사는 절 안에 석굴암 모형을 만든다는 계획이 정부에서 통과된 거다. 이 역시 불국사를 훼손하는 일이라서 반대했다. 저 너머 산에 굴뚝이 하나 있다. 쓰레기 소각장인데 그걸 그렇게 막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사연들이 참 많다. 나도 나 사느라 바쁜데 안 하면 가슴이 아프거든. 우리 문화자원을 알게 되면 훼손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도 되지. 아니까 괴로운 거다. 싸우는 것보다 내 마음이 괴로운 게 더 힘드니까 하는 거지.

Q. 문화에 관해 그 정도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사회 활동을 하거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30년 전 수오재에 오기 전에 하던 일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난 원래 그림을 그리려 했다. 문화유산 관련 활동과 병행했지. 당시 함께 활동하던 단체에서 박재동, 그 형이 회장이었고 내가 부회장이었다. 87년이었지. 유홍준 선생님도 같이 활동했다. 서울에서 대학원 다닐 땐데,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내 작업실에서 한국 문화를 보호하고 알리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토론했다.

유홍준 선생 책 나오기 훨씬 전인데, 한국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었을 때 내가 첫 총무를 3년 했다. 어느 날 어디로 답사를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있냐, 하면 내가 제일 먼저 참여했다. 어릴 때부터 절터 같은 오래된 곳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다른 회원들은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문화적인 소양은 아마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갖췄던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 전통문화가 서린 곳이라면 전국을 다 돌아다녔던 것 같다. 섭렵했지. 그런 곳을 갈 때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의미가 뭘까를 가장 많이 생각했다. 어쨌든 답사를 다니느라 시간도 많이 들고 글도 써야 하고. 그렇게 열심이다 보니 답사와 그림을 병행하기 힘들더라고.

그림에서 글로 변태하다

Q. 방금 그림을 그렸다고 했는데 어떤 그림이었나?

서예와 동양화를 했다. 지금은 그림은 안 그리고 책을 쓰는 작가다. 기행 작가.

그림이나 글이나, 난 같다고 본다. 문화라는 건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 같지 않나. 그림을 그린다는 건 액자 안, 아니면 화선지 안인데 글도 모아서 사각형 종이에 옮겨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거지. 이젠 글에만 집중하고 있다. 책도 몇 권 냈고.

Q. 예술의 길에서 글, 음악, 그림 작업은 같은 영역이란 말인데,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아니고 글을 잘 쓴다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장르를 크게 바꾼 건데,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처음에 그림을 그릴 땐 대가가 돼야지, 그런 마음 다 있겠지. 하지만 누구나 다 그럴 순 없지 않나. 나보다 잘난 사람도 많고. 물론 나도 처음엔 붓을 안 놓으려 했다.

그림이란 건 준비가 굉장히 필요하다. 어떤 걸 화선지에다 그리겠다 하면 몸도 마음도 준비할 게 많다. 그런데 글은 어디에 가든 그냥 쓸 수가 있다. 메모가 곧 완성된 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림은 공간도 필요하고 제약도 많다.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굳이 나까지 그림을 안 그려도 되겠다, 생각했지. 난 글 쓰는 게 오히려 더 좋겠다, 했지.

달빛이 만들어낸 대나무 그림 때문에 붓을 꺾다

Q. 매란국죽을 잘 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달빛에 비친 대나무 그림을 보고 붓을 꺾었다던데.

매란국죽은 옛날에 조금 했던 거지, 뭐.

우리 집에 고택이 여러 채고 대나무도 많다. 고택 회벽이 희잖아. 대나무가 달빛을 받아 회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그게 바로 살아있는 그림인 거야. 그걸 하염없이 바라보는 거지. 이야… 인간이란 게 아무리 잘나도 자연보다 못하다…. 그리고 대가 막 바람에 흔들리면 회벽의 그림이 변화무쌍한 거야. 자연이 저렇게 울림을 주는데 인간은 못 당하겠다. 그렇게 자연에 굴복당한 거지.

Q. 기행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는데, 쌓여 있는 책 가운데 <왕의 길을 걷는 즐거움>이란 책이 눈에 띈다. 어떤 내용인가?

걷는 즐거움 시리즈 중에 하나다. 처음 낸 책은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으로 2005년에 한겨레출판사에서 펴냈다. 북경대학교 교재에도 실렸다.

<왕의 길을 걷는 즐거움>은 경주가 배경인데, 우리나라에서 경주에 왕릉이 제일 많잖아. 그런데 이 많은 왕릉 전체를 하나로 연결한 책이 없더라고. 물론 간단한 안내서 같은 건 있겠지. 그래서 내가 인문학적으로 좀 더 격 있게 써보고 싶었던 거야. 전체 왕릉을 걸으면서 썼어. 걷는 즐거움을 함께 담았지.

단소는 그의 신체 일부다

Q. 내내 피리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이건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계기나 사연이 있잖아. 똑같은 상황이라도 자기 식대로 생각하고. 나는 이 단소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난 어릴 때부터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있었고, 국악에도 관심이 많았고, 사학에도 그랬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힘들 때가 있잖아. 그때 단소를 배웠다. 꽤 오래됐지. 그래서 내 몸의 일부처럼 단소를 들고 다니게 됐는데, 꼭 불고 싶어서라기보다 뭐랄까, 삼손이 머리카락이 없으면 힘이 없듯이 난 이게 없으면 마음이 불안하다랄까. 그래서 마음 내킬 땐 혼자서 서른 곡도 불어버린다.

딱히 악보를 보고 분다기보다 내가 정확하게 아는 노래면 내 방식대로 분다. 해외 공연도 몇 번 했다.

Q. 한 곡만 부탁한다.

술 한 잔 들어가야 잘 부는데, 안 마셔서 될지 모르겠다. 큰일 났네.

(울산저널 TV 유튜브에서 이재호 대표의 단소 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술 한 잔 마시고 신청곡 내 다 해드릴게.

Q. 단소로 30곡씩 부르면 실제로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다. 그렇게 이겨내야만 했을 힘든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 자기 식대로의 힘든 아픔들이 많잖아. 금전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인간적 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까도 말했듯 난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많이 느끼는데, 고통의 극한 상황이 됐을 때, 예를 들어 친구 사이에서 용서를 도저히 못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 관계를 끊어버리면 차라리 편하거든. 그전까진 굉장히 괴롭잖아. 아픔이란 게 그런 마음이지.

신라 시대에 월명 스님이 달밤에 피리를 부니 달이 멈췄다는 기록이 있다. 예전에 삼국시대 관련해서 보름 동안 기행한 내용을 부산일보에 3년 동안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 달밤에 나 혼자 있을 때 눈을 감고 단소를 불었다. 스무 곡, 서른 곡쯤 불었을 거다. 다 불고 눈을 딱 떴을 때 달이 그대로 있더라고.

이재호의 단소 연주는 달을 멈추게 했다

Q. 달이 소리를 감상하느라 멈춘 건지, 몰입의 정도가 강해 시간의 흐름에 괴리를 느낀 건지.

글이든 연주든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된다. 다른 사람과 동행하면 감정이든 시간이든 연결돼 버리니까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항상 현장에서 글을 쓰는데, 어찌 보면 여행하건 글을 쓰건 연주하건 모두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때 단소를 불면 오롯이 고독한 가운데 순수한 나 자신과 만나게 되고 집중하게 되는 거다.

Q. 고향이 어딘가?

경남 의령.

옛날엔 나이 들면 고향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들을 했잖나. 도회지와 분리돼 있어서 위안을 받을 수 있고, 가면 평온하고. 그런데 지금은 난개발로 엉망이잖아. 도회지나 고향이나 모두 다. 고향이 꼭 위안이 되는 건 아니더라.

고향과 비슷한 게 애인인 것 같다. 어릴 땐 순수한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파트 이야기나 하고 세상살이에 찌들어가면 환상도 깨지듯이 고향이란 게 그렇게 환상이 깨지고 있다. 그래서 난 고향과 애인은 그리워하는 곳으로만 남겨두자는 거지.

Q. 울산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인연이란 게 참 묘하더라. 원래 난 서울에 정착하려 했다. 물론 말년엔 전원 생활하겠다고 다짐했지. 도회지란 내가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고. 그런데 군대 생활을 울산에서 했다. 그게 인연이 돼서 울산에 정착하게 됐다. 경주는 내가 선택한 곳이고.

경주에 오기 전에 부여가 내가 원하는 분위기에 맞았다. 그런데 부여엔 문화유적이 많이 없어서 경주를 최종 선택하게 된 거지.

Q. 가족은?

난 경주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족을 모두 데리고 왔다. 95년에 왔으니 딱 30년 됐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해외에 나가 있고 여기엔 혼자 있다. 아들은 캐나다에 가 있고 딸은 영국에 있고.

우리 나이가 되면 대개 아이들이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데 난 좀 다르다. 어릴 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듬뿍 줬고, 친구 같은 사이가 됐고, 이젠 온다 해도 말린다. 할 일이 쌓여 있다 보니 귀찮다.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해서 방해받기 싫다.

못 쓰는 서양 주택은 재생이 안 되지만 한옥은 해체와 조립을 통해 재생이 가능하다

Q. 고택을 개조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보통 세컨드 하우스라고 하면 도시 살면서 간혹 쉬러 오는 작은 공간쯤으로 여기는데 난 움직일 때 가족 전체가 함께 움직였다. 작으면서 괜찮은 집도 있었지만, 책도 다 안 들어가고. 내 삶 전체를 옮길 만한 집이 필요했지.

하도 많이 돌아다녔다 보니 대한민국 어느 마을에 어떤 기와집이 있고, 하는 정도는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땐 내가 살 집을 보러 간 게 아니라 문화유적을 만나러 간 거였지만. 그런데 다시 보고 싶어서 3년쯤 뒤에 가면 쓰러져서 없고. 아니, 왜 정부는 이런 걸 보존하지 않지? 지금에야 서울 한복판에 한옥 붐이 일어나고 있지만 옛날엔 그냥 방치했지.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한번 살려보자 한 거다. 수몰되는 지역이나, 공단이 들어서거나, 내가 안 가져오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을 집을 데리고 온다. 나와 인연이 없으면 다 없어질 집들이다. 그래서 95년부터 사고 96년부터 옮기기 시작했다. 전국에 열일곱 채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그리고 일곱 채를 지었다. 그중에 한 채는 균형이 안 맞아서 해체되고, 지금 서 있는 건 여섯 채. 요 앞에 있는 집은 순조 15년인 1815년에 지은 전라북도 제일 갑부 집이었는데, 210년 됐다. 김제 만경에 있던 건데 길 때문에 헐리는 걸 사서 복원한 거다. 다들 100년은 넘고 돌은 다 신라 시대 돌로, 1300년씩 된 돌이다.

Q. 대한민국에서 아스팔트 시멘트 토건을 위해 저렇게 몇백 년 된 집을 그냥 밀어버리고 있다고?

그렇다. 공단 들어서거나 전부 다 수몰되거나. 김제 만경면에 대로가 뚫리면서 200년 넘은 집을 철거해야 했던 거다. 지금은 왜관 위쪽인 칠곡에 구미 제3공단이 들어서면서 고택들이 모두 헐리게 됐다.

그런 식으로 헐리면 그냥 없어지는 거지. 그래도 한옥은 다행히 레고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못을 쓰는 서양 집들은 옮기지 못하지만 우리는 전부 다 끼워 맞추는 거다. 헐리기 직전 전부 다 분리해서 가져와 이렇게 끼워 맞춘다. 못 친 건 안 된다. 모두 쪼개진다.

기와부터 한 장 한 장 다 떼고, 벽은 허물고. 가져온 뒤 역조립이다.

Q. 해체를 해서 가져와 해체하기 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한 거네. 기왓장 순서까지도.

그렇다. 거기 있던 걸 내가 데려와 실린 거다.

우리 집을 펜션이라고들 하는데, 내가 숙소를 지은 건 아니고 지금도 살고 있는 내 집을 지은 거다. 당시엔 펜션 이런 말이 없을 때였다. 펜션이란 말이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양식 노후대책 같은 걸로 생긴 거 아닌가.

숙소는 아니었지만 십몇 년 동안 대한민국 오만 사람들 재워줬다. 2007년부터니까 18년째다. 그러다 보니 내 집이면서 숙소도 겸하게 됐다. 내 집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사람이 오면 반갑고, 뭐 그렇다.

나를 지키는 집, 수오재에서 앞으로 책 열 권만 더 쓸 것이다

Q. 2025년 한 해에 세워놓은 계획이나 수오재의 목표가 있나.

올해로 내가 여기 온 지 30주년이더라. 이 집이 210년 된 집이었으니 사연이 있겠지. 그냥 돈 들여 짓는 집은 사연 같은 게 없잖아. 그런데 이렇게 오래된 집들은 사연이 많을 거거든. 그런 사연들은 내게 재미가 있다. 안동 어디서 가져왔고 또 어디서 가져왔는데, 하는 그런 사연들을 담은 책을 쓸 거다. 거의 마무리됐다.

그리고 신문에 연재한 내용도 많은데 이것도 정리를 할 예정이다. 1년 6개월 정도 부산일보에 <이재호의 폐사지를 찾아서>를 연재했는데, 한국의 절터, 폐사지를 걷는 즐거움도 출판이 예약돼 있다. 이 외에도 옮겨온 우리 집 고택 말고도 전국의 옮겨온 고택들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재한 글들이 있다. 이것도 책으로 낼 계획이다.

올해 낼 책들을 포함해서 이제 10권 정도만 더 내면 내 글쓰기도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Q. 수오재란 의미는 뭔가?

난 우리 집 이름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다. 흔히 생각하는 닦을 수(修)가 아니라 지킬 수(守), 나 오(吾), 즉 나를 지키는 집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사상과 철학으로 뛰어난 다산 정약용 그분 글에 수오재라는 말이 나온다. 정약용에게 형이 세 명 있었는데, 셋째 형 정약종은 정약용과 함께 매를 맞아 죽었고, 둘째 형은 영화 <자산어보>에 나온 캐릭터인 정약전이고, 제일 큰 형이 정약현인데, 맏형 집 이름이 수오재다.

Q. 마지막으로 울산저널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기 식대로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정말 남에게 감동은 못 주더라도 적어도 자기가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되지 않겠나. 살아가면서 남을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은 더 좋고, 남에게 감동을 준다는 자체가 이미 감동인 거거든. 여러분도 삶을 반추해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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