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원스’ 번역 황석희···“대본 곳곳 유머 찾아 넣고, 직접 가이드도 불렀죠”

2025-03-26

2014년 초연 이후 11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은 뮤지컬 <원스>를 다시 본 관객이라면, ‘어딘가 더 재미있어졌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일랜드 토박이 싱어송라이터 가이(GUY)가 체코 출신 이민자 걸(GIRL)을 만나 짧지만 강렬한 음악적·감정적 교감을 나누는 내용의 <원스>는 동명의 아일랜드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이민자인 걸이 어수룩한 한국어를 하는 설정은 초연 때와 같지만, 그가 발랄한 말씨로 엉뚱한 단어를 선택할 때 관객이 예기치 못하게 ‘빵 터지는’ 웃음 코드는 재연에서 적중률이 높다.

<원스> 번역을 맡은 황석희 번역가는 “유머가 갑자기 많아지지 않았냐, 황석희가 넣은 거 아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20년 차 영화 번역가이자, 2019년 <썸씽로튼> 작업 이후 뮤지컬 번역까지 발을 넓혀 온 황 번역가는 ‘유머러스한 번역을 잘한다’는 세간의 평가를 “편견”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영화 <데드풀>(2016) 속 욕설을 한국말로 차지게 번역해 ‘초월 번역가’라는 별명이 붙으면서 구축된 이미지란 것이다.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지난 24일 만난 황 번역가는 “저는 대본에 있는 것을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큰 번역가”라며 “제가 새로 넣은 유머가 아니라 대본이 원래 웃기다. 구석구석에 있는 영국식 유머를 찾아서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그는 번역가로서 원작자의 의도를 가장 중시한다고 했다. <원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직역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영국 유머는 우리가 듣기엔 정말 재미가 없거든요. 점잖게 말하면서도 한 방 먹이는, 그런 유머들이에요.” 그는 “사소한 위트 하나하나를 집착적으로 살리는 데 오기가 있는 편이라 살려야 하는 부분을 최대한 살렸는데, 타율이 어떨지는 모르겠다”며 웃었다.

오리지널에서 걸과 어머니, 체코 이민자 친구들이 어눌한 영어와 유창한 체코어를 오가는 부분은 어눌한 한국어와 유창한 한국어(체코어가 자막으로 무대에 나타남)로 표현된다. 황 번역가는 “(그 차이를) 너무 강조하자면 희화화될 수 있기에 선을 잘 지키려 했다”면서도 “작품 내에서 유머를 극대화할 수 있는 훌륭한 장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영어 원문을 보면, 시종일관 틀린 문법으로 적힌 걸의 대사는 단 한 순간 완벽하게 쓰여 있다고 한다. 은행 매니저에게 대출 신청을 하러 가는 장면인데, ‘이렇게 영어를 잘한다고?’ 싶을 정도의 유려함에 그는 “극적 과장으로 유머러스하게 만든 장면”임을 파악했다고 했다. 황 번역가는 “앞에 서툰 영어를 해왔다는 설정이 쌓여야, (기죽지 않기 위해) 세련된 표현으로 은행에서 말하는 게 유머러스하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라며 “한국어로도 수려하게 번역해서 이를 잘 살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황 번역가는 <원스>가 “가볍게 소모되는 캐릭터가 없는 뮤지컬”이었기에 더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캐릭터 하나라도 취향은 어떻고, 어떤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인지가 텍스트 안에 다 들어있다”며 “영화보다 풍부해진 작품”이라고 평했다. 배우들은 오케스트라 없이 직접 16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극에 생동감을 더한다.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는 황 번역가에게 <원스>는 애정이 남다른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20대 때 10년 가까이 밴드를 하기도 했다. “특히 포크를 좋아해서 많이 불렀다“는 그는 이번 작업에서 이례적으로 직접 몇 곡의 가이드를 녹음해 팀에 전달했다고 한다. “읊조리듯 부르는 부분이 많은 아이리쉬 포크는 가사가 음표에 일대일로 붙지 않는 부분도 많아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원스>의 주제곡 ‘폴링 슬로울리(Falling Slowly)’는 유명한 곡인 만큼 고민도 컸다. ‘가라앉는 배’가 상징물로 등장하는 가사를 한국어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초연에서 ‘가라앉는다/붙잡아 줘/더 늦기 전에’로 번역됐던 가사는 ‘늦지 않았어/저 배를 타/내 손을 잡아’로 바뀌었다. “배의 이미지를 살리고, 촉박하지만 지금 올라타면 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전달하려고 고심했다”고 한다. 가이가 걸에게 용기를 북돋고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는 노래처럼 들릴 수 있게 어투를 설정하기도 했다.

가이의 아버지 다(Da)가 부른 ‘라그랑 로드(Ragland Road)’에선 사심도 넣었다. 다를 맡은 이정열 배우가 가수였던 시절부터 팬이었다는 그는 “어떤 음절에서 멋있는 바이브레이션이 멋있는지 알 정도로 팬이라, 더 욕심이 났다”며 “포크 정서에 맞는 가사를 써서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황 번역가는 뮤지컬 <렘피카>와 <겨울왕국> 초연 번역도 앞두고 있다. 영화 번역가로서의 경력이 훨씬 긴 그에게 공연 번역은 아직도 신기한 경험이라고 한다. 번역문의 빈구석을 배우·연출자가 채워줄 수 있다는 데서 놀라움을 느낀다고 했다.

“두 가지 언어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 존재합니다. 뉘앙스를 다 살리지 못할 경우, 기꺼이 만들어둔 번역문은 80%밖에 안 될 경우도 있죠. 그런데 공연은 배우가 노래와 연기로, 연출자의 연출로, 안무가의 동선으로 설득력을 채우기도 하더라고요.” 황 번역가가 말했다. 그는 “영화 번역은 제가 어떻게든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서 관객을 납득시켜야 한다면, 공연 번역은 제가 해온 것 중 가장 덜 외로운 작업”이라고 했다.

황 번역가의 ‘말맛’ 있는 번역과 배우들의 호연이 어우러진 뮤지컬 <원스>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오는 5월31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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