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형사재판소(ICC) 검찰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는 탈레반 최고지도자 등에 대해 여성을 박해한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카림 칸 ICC 검사장은 23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 탈레반 최고지도자와 압둘 하킴 아프가니스탄 대법원장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칸 검사장은 “이들에게 성별에 따른 박해라는 반인륜 범죄에 대한 형사적 책임이 있다고 볼 합당한 근거를 확보했다”면서 탈레반 식 샤리아(이슬람 관습법) 해석이 인권 침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ICC 검찰은 2021년 8월 미군 철수 직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장악한 뒤로 여성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인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한 뒤 여성의 중학교 진학을 금지하고 취업을 제한하는 등 여성의 권리를 광범위하게 침해하는 조치를 잇따라 시행했다.
탈레반 집권 후 공적 장소에서 여성의 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아프간 여성들은 탈레반이 내놓은 자칭 ‘도덕법’에 따라 집 밖에서 신체를 완전히 가려야 하며, 남성 ‘보호자’ 없이는 외출도 제한된다.
여성은 공원이나 체육관 등 상당수 공공장소에 출입이 금지되며, 공공 장소에서 노래하거나 시를 낭송해서도 안 된다. 집 밖에서 신체 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보이지 않도록 강제한 것이다. 일부 지역에선 TV와 라디오에서 여성의 목소리 송출을 중단했다.
탈레반은 지난해 상급학교 진학을 금지 당한 여학생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교육시설 역할을 해온 보건학원까지 폐쇄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엔은 이런 탈레반의 조치들을 ‘젠더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 여성 차별 정책)’라고 규정하고 있다.
ICC 검찰의 체포영장 청구에 대해 탈레반 지도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ICC 검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전쟁 범죄 및 인권 침해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체포영장을 청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ICC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 등을 검토한 뒤 체포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이며, 이런 절차엔 통상 3개월 정도 소요된다.
다만 체포영장이 발부되더라도 아쿤드자다 등 탈레반 수뇌부가 외국을 방문하는 경우가 드물어 실질적인 영향은 크지 않다는 관측도 있다.
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한 경우 원칙적으로는 125개 ICC 회원국들은 체포 당사자가 자국을 방문하면 즉시 체포해 헤이그 재판소로 신병을 인도해야 하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아도 ICC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는 한계점도 있다.
ICC는 지난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으나, 주요 회원국들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체포 의무에 대해 엇갈린 입장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