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에 취약한 편이다. 책 볼 때도 마지막 장을 남기는 습관이 있다. 끝에 다다르면 불쑥 지겨워진다. 심지어 소설도 가끔 결말을 대충 짐작하고 책을 덮는다. 글 쓸 땐 더하다. 비장하게 시작하곤 끝까지 글을 잘 끌고 가지 못한다. 특히 한 달에 한 번 이 칼럼은 도무지 마감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주초에 첫 문장을 써놓곤 화면 커서만 깜빡깜빡하며 일주일이 지나간다. 그래서 항상 흐지부지 책을 읽는 중이고, 흐지부지 글을 쓰는 중이다.
깔끔하게 툭툭 털고 마무리한 것들이 인생에 얼마나 될까. 마지막 문단을 완성 못 한 글들이 가득한 일기장을 미련하게 되새기며 산다. 매일 직장 욕을 하면서도 이직하지 못하는 친구, 너덜너덜해진 연애를 지지부진 못 끝내는 친구에게 자연스레 상담사가 된다. 매듭짓는 일에 취약한 건 이미 열정을 다 써서 지리멸렬해진 내용물을 직시하고, 소감을 멋지게 말하며 다음 장으로 떠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진짜는 단칼에, 한방에, 의문부호 없이 시작되고 끝난다.
지난 20일 데이비스컵 준준결승 단식을 끝으로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38·스페인)이 툭툭 털고 코트를 떠났다. 은퇴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는 이곳에 은퇴하러 온 것이 아니다. 팀 승리에 도움을 주려고 왔다”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마지막 경기를 정말이지 치열하게 뛰었다. 스피드와 체력으로 벽처럼 넓고 단단하게 베이스라인을 커버하던 그였지만 어느덧 약해진 무릎을 못 숨겼다. 코너로 깊숙이 들어온 마지막 샷을 늦게 뛰어 겨우 받았고 공은 코트를 못 넘겼다.
마지막 경기 패배가 아쉬울 법도 한데 그는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나달은 은퇴식에서 “몸이 더는 테니스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레전드 선수, ‘흙신’ 같은 별명 대신 “마요르카의 작은 마을에서 온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24년간 클레이코트를 지배했던 제왕의 소망이 소박했다. 나달과 가장 드라마틱한 라이벌 역사를 썼던 로저 페더러도 2년 전 은퇴 경기에서 패배했다. 그 마지막 복식 경기에서 파트너는 나달. 페더러는 나달 은퇴에 바친 헌사에서 “그날 너와 코트를 공유하고 눈물을 함께 흘린 건 내 커리어 평생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떠나는 두 선수의 뒷모습이 말쑥하다.
연초가 다짐의 시간이라면 연말은 마무리의 시간이다. 훌훌 떠나는 좋은 마무리는 힘껏 다 짜내서 열정을 쏟아부어야만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럼에도 아직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억지로 마무리하지 말자. 대신 내년엔 더 뜨겁게 하자. 지난달 일흔넷의 조용필이 스무번째 앨범을 냈는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되겠다 싶으면 그때 그만두겠습니다.” 마무리 못 한 일들은 안 되겠다 싶을 때까지, 뚜벅뚜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