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한국 여성문학 100년] (15) 80년대 페미니즘 소설의 출발, 고발과 고통의 젠더 리얼리즘

2025-10-31

이경자의 연작소설집 <절반의 실패>(1988)는 1980년대 후반, 한국 문학계에서 여성주의 의식이 본격적으로 확산하던 시기에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인 목소리를 낸 작품 중 하나다. <절반의 실패>가 출간된 1980년대 후반은 한국사회가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시기였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는 자신의 권리를 말하고 주장하는 ‘시민’의 출현을 가져왔지만, 이 보편적인 시민의식은 여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했다. 가정과 일터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부장적 규범과 보수적인 사회 구조는 여전히 견고했다. 작가는 다양한 계층과 학력, 다양한 사연을 지닌 여성들이 하나같이 고통받고 울부짖으며 집안의 천사가 아닌 노예 상태로, 최후의 식민지로 존재하고 있음을 생생한 날것의 리얼리즘으로 폭로하고 있다.

여성의 고통, 성차별적 사회 시스템의 산물

<절반의 실패> 초판본에는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으며, 작품마다 다루는 소재가 무엇인지 명시돼 있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두 여자’(고부갈등), ‘안팎 곱사등이’(맞벌이 아내), ‘맷집과 허깨비’(폭력), ‘피의 환상’(남편의 외도), ‘치한의 사랑’(혼인빙자간음), ‘미역과 하나님’(매춘), ‘빈털터리’(성의 소외 1), ‘살아나는 시간’(성의 소외 2), ‘절반의 실패’(이혼), ‘둘남이’(빈민여성 1), ‘목숨앗이 1’(빈민여성 2), ‘목숨앗이 2’(빈민여성 3). 남편의 외도와 폭력, 고부갈등, 성매매, 혼인빙자간음, 성의 소외, 이혼, 하층 계급 여성의 현실까지 작품들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낸 갖가지 폐단을 고발한다. 각 단편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과 소외의 양태를 개별적으로 다룬 듯하지만, 이것들을 한 소설집에 담아내면서 계층, 학력, 지역, 연령의 차이를 초과하는 억압이 곳곳에 퍼져 있음을 강조한다. 작품이 다루는 소재들은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 억압의 스펙트럼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여성에 대한 남성 폭력이 전 분야에 걸쳐 촘촘하게 행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적 배치를 통해 작가는 여성의 고통이 특정한 개인이나 사건에 한정된 예외가 아니라 성차별적인 사회 시스템의 결과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즉 수록작 전체가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젠더 질서를 고발하는 거대한 사회 보고서 또는 증언집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성매매 여성이나 혼인빙자간음을 다룬 작품들을 제외하고 이 연작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여성이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는 장소가 ‘집’이라는 사실이다. 한때 직업을 가지고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건, 학력도 돈도 없는 빈민 여성이건 이들은 소위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다움, 아내다움을 수행하거나 연기해야 하고, 남편의 외도와 폭력, 무능력을 감내해야 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공사 영역 분리가 명확해지면서, 여성에게는 가정의 관리자 역할, 양처이자 현모의 역할이 부과됐다. 여자다움은 이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다. 소설 곳곳에서 “결혼한 여자는 가정이 직장”이며, “아내란 남편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 “남편은 하늘”이며, “남자가 바깥만 파는 것”, 즉 외도를 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에게 낯익은 장소인 집은 불안과 의심, 남편의 폭력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데서 오는 공포감이 지배하는, 낯익지만 낯선 언캐니(uncanny)한 장소가 돼버렸다. 소설은 남편의 구타로 인해 멍들고 찢긴 몸, 알코올중독이나 트라우마로 병든 남편을 대신해 노동에 지친 거칠고 그로테스크한 몸을 계속 보여준다. 특히 하층 계급 여성의 현실을 소재로 한 ‘둘남이’, ‘목숨앗이 1’과 ‘목숨앗이 2’에서 여성의 몸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가부장적 폭력이 결합한 이중 억압의 비극적인 장소가 된다.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아버지의 욕설과 폭력에 짓눌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견디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 ‘목숨앗이 1’에서 서술자는 “아버지와 가장이라는 이름은 그들 가족의 먹고 자고 서로 엇물려 사는 삶 자체에 마치 공기 같은 자연력으로 존재하였다”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자연법처럼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이 여성들은 아감벤이 일찍이 말한 ‘호모 사케르’들이다. ‘둘남이’에서 남편의 구타로 죽은 둘남, ‘목숨앗이 2’에서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력을 당한 딸을 보고 분노해 항의하다가 “추악한 짐승 한 마리” 취급을 받으며 끌려나가는 수미 엄마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다.

표제작인 ‘절반의 실패’는 소설집 전체의 주제의식을 응축하고 있다. 주인공 정순은 겉보기에 대학교수인 남편을 둔, 안정된 중산층 가정을 경영하는 전업주부지만 남편의 외도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의부증에 걸릴 정도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결국 그는 주류 사회가 규정한 안정된 가정, 현모양처 역할, 경제적 풍요를 포기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남편 기남은 자신의 외도를 ‘실수’로, 아내의 이혼 요구를 헛똑똑이의 ‘시건방진 짓’으로 치부하고 폭력까지 행사한다. 소설집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여성들이 비참한 상황에서도 결혼 유지를 선택한 것과 달리 ‘절반의 실패’의 정순은 이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1989년 가족법이 개정되기 전에 쓰인 이 소설에서 정순은 “굴욕적인 삶을 사절하는 값으로, 수태·임신·출산·양육에 대한 권능”, 즉 친권을 박탈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혼을 선택한 이유는 남편의 외도와 폭력을 용인하는 굴욕적인 삶이 ‘완전한 실패’라면, 이혼은 ‘절반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공이 현모양처 역할로 한정됐던 시대에 가정 밖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사회에서는 비규범적인 행위로 치부됐기에 정순의 선택은 ‘실패’다. 하지만 이 ‘실패’가 ‘절반’인 이유, 바꿔 말해 ‘절반’은 ‘성공’인 이유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완벽한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 주권 권력에 유의미한 균열을 내고 주체적인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당연시되던 남녀의 삶의 방식에 ‘화염병’ 던져

<절반의 실패>를 여는 첫 번째 소설 ‘두 여자’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남성 폭력이 우세한 와중에 페미니즘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1980년대의 상황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여자들은 자꾸만 생각이 바뀌는데 남자들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남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여자 문제는 똑같다구요. 시부모 학대, 남편의 외도, 뭐 달라지는 게 없어요.” 작가는 지방의 여성 문제 상담 기관에서 간사로 일하는 후배의 입을 통해 젠더 폭력이 여전히 세습되고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임을 폭로한다. 페미니스트인 후배는 “가족제도의 발생에 대해, 남녀 불평등의 기원과 모계사회의 소멸 과정”에 대해 들려주지만, 배운 여자인 명희조차 이런 이론적 담론을 아직은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고부갈등을 그린 이 작품에서 며느리인 명희는 “결국 시어머니도 나와 똑같은 가련하고 고독한 여자”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괴롭힌 시어머니에게 느끼는 동질감은 페미니즘 ‘이론’은 아직 멀리 있고, 자신이 가부장제로부터 받은 피해를 같은 여성에게서 보상받으려는 ‘현실’은 가까이 있는 상황, 즉 이론과 현실의 낙폭을 자각한 데서 파생된 감정일 터이다. 남편이자 아들인 남성 가해자는 뒤로 물러나고 어머니와 아내 두 여자가 대리전을 치르는 구조적 모순을 어렴풋이 간파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경자는 2020년 <절반의 실패> 복간 즈음한 인터뷰에서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남성과 여성의 삶의 방식에 일종의 ‘화염병’을 던진 작품이었다”라고 회고한다. 화염병의 뜨거움처럼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직설적이다. 작가는 여성 억압의 현실을 미화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여성의 정신과 몸을 피폐하게 하는 남성 폭력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문체 전략을 구사한다. 이 소설이 지닌 정치성과 페미니즘 소설로서의 역사성은 소설이 제기하는 강력하고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독자들이 지금 오히려 미묘하고 진화된 형태로 작동하는 젠더 갈등의 근원을 역추적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첫 발간 후 30여 년이 지나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여성 독자들에게 다시금 소환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양선 한림대학교 일송자유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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