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첨단산업 육성 위한 기술사업화 생태계

2025-03-27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두 얼굴의 연구자'로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 살상용 독가스 개발로 잔혹한 인명 피해의 원흉으로 꼽히지만, 한편으로는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고 세계 식량난 해소에 공헌해 191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가 활동하던 20세기 초는 식량이 인구 증가세를 감당하지 못하던 시기다. 작물 생장을 위한 토양 영양분이 충분해야 하는데, 기존 천연 비료로는 부족해 인공 비료(암모니아) 개발이 절실했다.

하버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1908년 고온·고압 환경에서 철을 촉매로 암모니아 인공 합성을 발견했다. 이후 화학회사 바스프(BASF) 지원으로 1913년 상용화에 성공했다. 인류에게 인공 비료 대량 생산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하버의 암모니아 연구에 인류를 구해낸 최고의 화학식이라는 찬사를 붙이는 이유다.

이런 성과는 하버 홀로 이뤄낸 것이 아니다. 발터 네른스트, 로버트 르 로시뇰 등 당대 화학자들은 암모니아 추출을 더 많이 하려면 기압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을 보탰다. 또 바스프는 대규모 자금으로 당시 기술로는 까다로운 고압 환경을 만들고 상용화에 필요한 설비를 구축해줬다. 하버는 그때까지 뚜렷한 업적이 없어 사실상 무명이었지만, 외부의 우수한 인재, 충분한 자금 덕분에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기업이 기술을 실제 제품이나 서비스로 구현해 판매하고 성장해가는 스케일업의 과정을 통틀어 우리는 '기술사업화'라고 부른다. 기술 경쟁은 연구개발 성과를 얼마나 빠르게 경제적 성과로 전환시키느냐의 경쟁, 즉 기술사업화 속도 경쟁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반면, 사업화는 다양한 이유로 실패한다. 자금 부족으로 양산이 늦어져 출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고, 가격이 비싸 소비자들이 외면하기도 한다. 어렵게 출시해도 마케팅을 못하면 경쟁에서 밀린다.

최근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이 초격차 기술력 확보를 위해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면서, 사업화 주기도 함께 단축되는 추세다. 우리나라도 미래 성장 엔진을 빨리 찾기 위해서는 국가첨단전략산업의 사업화 속도를 당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술사업화 성공을 위한 지원을 고려할 때, 앞서 인공 비료 개발 과정을 돌아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원활한 자금 지원이다. 불확실성이 컸던 암모니아 합성 성공도 바스프의 꾸준한 투자 때문이다. 투자 유치야말로 사업화의 첫 단추인 셈이다. 정부가 우수한 기술을 사업화하는 데 정책 금융을 확대하고 민간 투자 유치까지 지원한다면 큰 도움이 된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투자와 융자 형태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술 기업을 발굴하고 육성한다. 2009년 처음 조성된 산업기술 정책펀드의 규모는 현재 누적 2조4976억원이다. 일반 기업이 출자해서 만드는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펀드에도 정책 금융을 투입해 유망 기술에 대한 민간 투자를 적극적 유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첨단바이오, 로봇 방산 등 국가첨단전략산업 분야 기업에 연구개발 자금 융자 사업을 시작했다. 2027년까지 총 71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두 번째 요소는 기존 기술과 특허의 적극적 활용이다. 암모니아 합성 실험은 프리츠 하버가 성공했지만, 대기 중 질소와 수소를 결합하는 최초의 아이디어는 빌헬름 오스트발트라는 화학자가 먼저 제시했다. 하버는 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국내만 하더라도 공공 연구기관이 매년 새롭게 만들어내는 특허, 실용신안 등의 기술이 연간 3만건이 넘는다. 현재 국가기술은행에는 36만건이 넘는 공공 기술이 등록돼 있다. 이를 이전받으면 초기 기술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면서 사업화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

마지막 요소는 적극적인 기술협력 파트너다. 하버의 실험은 바스프 소속 수석 공학자 카를 보슈가 합류하면서 탄력을 받았다. 인공 비료는 대학 교수와 기업 연구실이 산학협력으로 뭉쳐서 만든 결과인 셈이다.

사업화는 자금, 인재, 기술 등 외부에 있는 자원을 기업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조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수요-공급 기업간, 대학-연구소간, 혹은 해외에 있는 산학연 등 조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외부의 파트너들과 손잡는 것은 시너지 창출 겸 위험 분산 차원에서 좋은 전략이다.

KIAT는 2000년 제정된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술사업화 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전담 기관이다. 기술이전법상 R&D 연구 성과의 사업화를 지원하는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함께 사업화 정책 기반을 마련한다. 최근에는 산학연관이 모두 참여하는 기술사업화 얼라이언스도 출범시켰다.

후속 연구개발의 주체는 당연히 기업이지만, 앞서 보았듯 기술사업화에서는 정부의 역할도 많다. 규제 개선, 실증 지원, 법제도 정비 등의 환경 조성이 대표적이다. 특히 신산업에서는 인증 기준, 표준 선점이 매우 중요하다. 표준에 선제적 대응이 첨단산업 글로벌 주도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주력 산업과 미래 먹거리 성장의 정체로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KIAT는 지난 20여년 간 쌓아온 노하우를 발판 삼아 올해는 보다 책임감을 갖고 기업 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기업에 필요한 자금, 인재, 기술이 잘 흘러가도록 공급해주고, 실증, 인증, 표준 제정 등을 통해 더 탄탄하고 촘촘한 기술사업화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겠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bjmin@kiat.or.kr

〈필자〉 전문 과학기술인으로 시작해 국회의원, 기관장으로 선임된 인사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정책 분야까지 확장했다. 1959년생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규슈대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로 입소했다. 이후 20년간 국내 원자력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과 한국원자력학회장도 역임했다. 2022년 9월부터 KIAT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민간 주도 성장 전략을 뒷받침할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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